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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에는 이도령이 과거시험장에 들어가 답안을 작성하고 장원급제하는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이도령 글제(출제문제)를 살펴보니 평생 짓던 바라. 시지(試紙.답안지)를 펼쳐 놓고 해제(解題.제목풀이)를 생각하여 왕희지 필법으로 조맹부 체를 받아 일필휘지 선장(先場)하니, 상시관시(시험감독관) 글을 보시고 자자이(글자마다) 비점(批點)이요 귀귀이(구절마다) 관주(貫珠)로다. 상지상등(上之上等.장원)을 휘장하여 금방(金榜.급제자명단)에 이름 불러 어주(御酒)로 사송(賜送)하니 천고에 좋은 것이 급제 밖에 또 있는가?" 이에서 특히 주목할 대목은 이몽룡이 답안지를 가장 먼제 제출했다는 점. 왜 답안지는 먼저 제출해야 했을까? 한국한문학 전공인 성균관대 안대회 교수는 "나중에 제출한 답안지는 채점조차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과거시험에서 답안지를 먼저 제출하는 게 합격에 절대 유리했다"고 말했다. 사실일까? 국립중앙도서관이 기획하는 '한국고전국역총서' 중 하나로 최근 곡운(谷耘) 권복(權馥.1769-?)이란 사람이 남긴 기행록으로 현존 유일본인 '곡운공기행록'(谷耘公紀行錄)이 완전히 번역되어 나왔다. 이 기행록은 그의 관료생활 중에서도 순조 18년(1818)과 순조 24년(1824)에 각각 전라좌도와 경상좌도에서 실시한 과거시험에 시험감독관인 경시관(京試官)으로 파견되어 일하면서 겪은 일들을 비중있게 다뤘다. 이에서 권복은 시험장의 폐습을 개혁하기 위해 자신이 취한 여러 가지 조치를 정리했다. 그 중 하나가 답안지는 정해진 시간 안이라면 언제건 제출해도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응시자들이 시권(試券.답안지)을 먼저 내려고 앞 다투는 구습을 바꾸어 편안한 마음으로 시권을 작성하여 제출케 함으로써 반드시 자신의 재주를 발휘하게 하려는 데 있다." "일찍 답안을 제출하지 말고 정성을 다해 작성하면 마땅히 축(답안지 뭉치)을 섞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그의 기행록에 의하면 시험장에 먼저 자리를 잡은 수험생들이 넓은 땅을 차지하는 바람에 늦게 도착한 선비들은 과장(科場)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태가 빈발했다. 이에 권복은 이를 혁파하기 위해 "과장을 둘러싼 가시나무 울타리와 막아 놓은 볏짚가리, 마루 위에 설치한 병풍을 철거하라고 명령"하는가 하면, 시험일 하루 전에 수험생들을 예비소집해 다음날 시험볼 곳을 지정하는 소위 '지정좌석제'까지 도입하기도 했다. 또 시험장 통제를 맡은 관노(官奴)들이 얼마나 대단한 위세를 누렸는지, "(그들이) 선비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니, 매우 공손치 못하고 말끝마다 '너, 너'라고 깔보면서 걸핏하면 욕지거리를 하는 것이 마치 소송하는 백성을 대함과 같다"는 증언도 기행록에 수록돼 있다. 더불어 대리시험과 서류조작, 뇌물 수수와 같은 부정행위가 광범위하게 저질러졌음도 알 수 있다. 권복은 뇌물을 막기 위해 시험 전에 "시관(試官)을 매수하려는 돈이 많이 나돌 것이니 수험생 여러분은 모름지기 미리 알아서 비록 백 명이 유혹하더라도 삼가 한 푼의 돈도 허비하지 마라"는 엄명을 내리기도 한다. 순조 18년 전라좌도 시험에서는 대리시험자가 적발되기도 했다. 박생이란 수험생이 남다른 재능이 있어 합격자 명단에 들었을 것이라고 판단한 권복은 그가 낙방했음을 알고는 그 연유를 캐 본 결과 서경규(徐慶圭)라는 다른 사람 이름으로 답안지를 제출했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요즘으로 치면 호적이 없는 사람이 관리와 짜고 호적이 있는 것처럼 서류를 조작해 응시했다가 적발된 일도 있었다. 강진 사람 홍세병이 그런 경우였다. 이에 그를 불러 자초지종을 캐 물으니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기행록은 적었다. "본래 저는 부여에서 살다가 3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강진 외가댁으로 와서 자랐습니다. 금년에 19세가 되었으나 입적(入籍)하지 못해 과거를 볼 수 없어 (호)적을 훔치게 되었습니다." 시험감독관을 수행하는 아전이나 노비 또한 뇌물을 받는 등의 폐해가 극심했던 듯, 이를 막기 위해 권복은 시험장 현지에 내려가서는 그들을 "모두 문을 잠그고 협실에 거처케 하고 밖을 엿보아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지게문 뒤에 측간을 만들고 가시나무로 사방을 둘러쳐서 밖으로 통하는 길을 막고는 항상 방 안에 거쳐케 하며 밥을 먹고 잠을 자게 할 뿐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이런 원리원칙을 고수하는 바람에 권복은 엄청난 격무에 시달렸다. 2천장이 넘는 시험 답안지를 다섯 번이나 반복해서 읽고 합격자를 직접 선정하느라 3일 밤낮을 자지 못한 데다 그 여파로 혼절하여 여러 날을 고생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험감독이 끝난 다음 귀경하는 길은 '주지육림'의 연속이었다. 시험장인 구례를 떠나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들른 곳마다 해당 지방관은 다투어 밤마다 권복 앞으로 기생을 대령했다. 그의 기행록은 밤마다 만난 기생의 이름을 하나하나 실명으로 기록하는가 하면 그들과 나눈 대화라든가 그들에게 받은 인상을 시시콜콜할 정도로 적었다. 어느 날에는 지방수령이 대령한 9명이나 되는 기생들을 바라보면서 "한 사람을 가려 취하려니 젊은 사람도 아름답지만 나이든 사람은 더욱 아름다우니 어지러워 고를 수가 없다"고 하는가 하면, "서른해 전엔 나 또한 스무살 젊은이었노라"는 구절이 담긴 시를 지어 기생에게 주기도 했다. 다른 고을에서는 24살 된 초월(楚月)이란 기생과 16살된 완월(完月)이란 기생 중 누구와 하룻밤을 보낼까 고민하면서 "나는 늙어서 나이든 아이가 좋으니 나이든 자를 남기고 어린 아이를 보내면 좋겠다. 하지만 한 사람도 버릴 수 없음은 사람의 도리니 어찌 두 아이를 돌보지 않으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번 기행록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우응순 연구원이 번역과 해설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