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정조를 ‘독살’했나? _유튜버는 얼마나 벌어요_krv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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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 어찰(御札) 299통 발굴 사실을 공개한 9일 기자회견에서 정조 독살설에 대한 질문이 쏟아지자 자료를 발굴하고 분석한 주최 측은 곤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단국대 사학과 김문식 교수는 "그건(독살설) 이 어찰의 본질이 아닌데…"라고 말을 흐리다가 계속 그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취재진이 요구하자 마지 못해 "적어도 이 어찰들로 보면 독살설은 사실이 아님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는 '조선왕조의 개혁과 이를 통한 근대화'를 꿈꾼 정조의 야망이 심환지로 대표되는 수구보수파인 노론 벽파(僻派)에 의해 독살됨으로써 좌절되고 말았다는 이른바 정조 독살설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번에 정조의 비밀 어찰이 무더기로 공개되고, 그에서 정조 독살설을 결정적으로 뒤집을 수 있는 증거가 속속 드러나자 그동안 독살설을 부정하던 측에서는 반기는 표정이 역력하다. 한신대 사학과 유봉학 교수가 이에 해당한다. 그는 타계한 미술사학자 오주석 씨와 함께 정조 타계 200주년이던 지난 2000년에는 정조 특별전을 예술의전당에서 개최한 데 이어 이를 토대로 이듬해에는 '정조대왕의 꿈'이란 단행본을 펴내기도 했다. 특히 유 교수는 이 책에서 정조 독살설이 왜 성립할 수 없는지를 상세히 분석했다. 유 교수는 정조 사후 5년만인 1806년(순조 재위 6년)에 일어난 이른바 '병인갱화'(丙寅更和)를 주목했다. 영조의 계비로 어린 순조를 대신해 정권을 장악한 정순왕후가 사망함으로써 집권 노론 벽파가 몰락하고 안동김씨와 반남박씨 세력이 주축이 된 시파(時派)가 집권함으로써 본격적인 세도정치 시대로 접어든 사건이 바로 병인갱화다. 유 교수는 "정조가 독살되었다면, 시파가 병인갱화로 정권을 장악했을 때 이런 독살설보다 더 좋은 혁명 구호는 있을 수 없었다"면서 "그럼에도 벽파가 정조를 독살했다는 주장은 집권 시파 세력에서도 제기하지 않은 낭설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유 교수도 지적하듯이 정조 독살설을 널리 퍼진 데는 역사학자보다는 소설이나 역사대중서가 결정적이었다. 지금은 이화여대 교수로 자리를 옮긴 이인화 씨의 소설 '영원한 제국'(1993)이 포문을 열었다면, 역사대중화를 선언한 작가 이덕일 씨의 사도세자나 정조, 혹은 정약용과 관련한 일련의 저작은 그것을 더욱 보강했다고 할 수 있다. 김문식 교수는 "정조가 독살되었다는 주장은 조선시대에 이미 남인들이 제기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광범위하게 유포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이는 그만큼 이인화 교수의 소설과 이덕일 씨의 저작이 미친 영향이 크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나아가 '영원한 제국'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는가 하면, KBS 역사스페셜에서는 이덕일 씨의 주장을 대폭 수용한 프로그램을 제작 방영하기도 했다. 더불어 독살설에 초점을 맞춘 것도 아니며, 그렇게 주장한 것도 아니지만 MBC 드라마 '이산'을 비롯한 각종 사극은 정조를 '개혁군주'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렇게 정조가 부각될수록 심환지가 대표하는 노론 벽파는 그런 흐름을 가로막은 수구보수파로 부지불식간에 몰리게 됐다. 유봉학 교수는 이런 흐름이 급기야 지금에는 "정조와 시파는 선(善), 노론 벽파는 악(惡)이라는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극단적 사관을 낳았다"고 비판했다. 유 교수는 "정조가 독살되었다는 주장은 소설적 상상력의 소산물이며, 그런 점에서 그런 뼈대를 내세운 소설을 거부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면서도 "그렇지만 그런 가공의 상상물이 사실(史實)의 영역까지 침범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대구 출신으로 본명이 '류철균'인 이인화 교수는 정조 독살설을 주장하게 된 근거 중 하나로 자기 집안에 내려오는 전승을 들었다. 숭실대 사학과에서 김일성의 독립운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덕일 씨는 역사학도답게 '정조실록'에 보이는 관련 기록들을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삼았다. 유봉학 교수는 "영남 남인 계열에서는 정조 독살설이 일부 퍼져 있었으며, 영남 남인 후손인 이인화 씨가 거론한 집안 전승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실록으로 대표되는 기록이다. 정조가 독살됐다는 가장 중요한 출발은 요컨대 "왜 그렇게 멀쩡하던 정조가 갑자기 죽었느냐"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한 정조실록 기록은 1800년 6월28일에 승하한 정조의 발병 기록이 불과 24일 전인 6월14일에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이 날짜 실록은 "임금께서 이달 열흘 전부터 부스럼 증세가 생겨 약제를 올렸으나 효력이 없었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밤에는 전혀 편히 자지 못했다. 일전에 약을 붙인 자리에는 벌써 고름이 터졌다'고 하셨다"고 했다. 독살설의 근거는 이에서 출발해, 정조가 사망할 때의 정황을 포착한 실록 기록을 보강해 정조와는 적대적이었다는 정순왕후와 심환지가 대표하는 노론 벽파에서 기득권 유지를 위해 독살을 감행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이런 독살설은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 편지가 무더기로 공개되고, 거기에서 병증을 호소하는 내용이 여러 군데서 발견됨으로써 사실상 근거를 상실했다. 이런 내용에 대해 이인화 교수와 이덕일 씨는 정조가 독살되었다는 의혹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 교수는 "당시 간찰이라는 것은 지금의 전화에 가까운 일상적인 통신수단이었으며 어찰 속에 구어적 표현이 있다고 해서 이것이 정조와 심환지가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고 지적하고 "정조는 하루에 10-20통씩 편지를 주고 받았기 때문에 18년간 300통은 결코 많은 규모가 아니다"고 말했다. 특히 이덕일 씨는 10일 평화방송 라디오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편지에서 병에 걸린 정조가 사후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면서, 정조가 사망한 바로 그날 정순왕후 김씨가 인사를 바로 단행해 심환지를 영의정에 임명한 점 등을 들어 여전히 독살설을 주장했다. 나아가 이씨는 이번 편지로 볼 때 정조가 오히려 노론 벽파에 이용당했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과연 그럴까? 이번에 발굴된 것과 같은 '비밀 편지'를 통한 정치를 정조는 심환지뿐만 아니라 다른 신하들에 대해서도 시도했다.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蔡濟恭.1720-1799)에게 보낸 편지도 최근 발굴됐으며, 정조에게는 외사촌인 홍취영(洪就榮.1759-?)에게 보낸 편지도 39통이 남아있다. 특히 홍취영에게 보낸 편지는 작성일자가 1792년 2월12일 이후 1800년 5월1일까지 작성된 것으로 모두 39통이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 중이며, 그 전부는 지난 2004년 리움이 '정조대왕의 편지글'이라는 제목으로 발간한 학술총서에 포함돼 모두 번역돼 나왔다. 이 중 승하 1년 전인 1799년 7월7일 발송한 편지에서 정조는 "나는 온 몸이 뜨거운 기운이 상승하여 등이 뜸을 뜨는 듯 뜨거우며, 눈은 횃불 같이 시뻘겋고 숨을 가쁘게 쉴 뿐이다. 시력은 현기증이 심하여 역시 책상에서 힘을 쏟을 수 없으니 더욱 고통을 참지 못하게 한다"고 증언했다. 이 편지와 이번에 발굴된 어찰을 종합할 때, 정조는 이미 이 무렵에 건강에 심대한 문제가 생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왜 실록에는 죽기 한 달 전에야 병세가 기록되기 시작했을까? 그 해답은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에서 찾을 수 있다. 사망 13일 전에 보낸 편지에서 정조는 "어제는 사람들이 모두 알아차렸기에 어쩔 수 없이 체모를 세우고자 탕제를 내어 오라는 탑교(榻敎.명령)를 내렸다"고 했다. 즉, 그동안에는 보안을 지켰는데 이날은 그것이 새 나가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약을 지어올리라는 명령을 '공개적'으로 내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정조가 그 자신의 병세를 시종일관 극도의 비밀에 부쳤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던 까닭은 그것이 새 나갈 경우 초래될 정국의 혼란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심환지 편지 외에도 홍취영에게 보낸 편지로 볼 때도 정조는 독살이 아니라 불치의 병에 걸려 병사(病死)했음은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