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공개된 편지에는 김 위원장의 성향과 함께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을 어떻게 대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들이 등장합니다.
■ '마법의 힘'·'환상적인 순간'…김정은의 미사여구 향연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했던 것은 과장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김 위원장이 작성한 두 통의 편지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친근함을 과시하는 화려한 미사여구 일색입니다.
먼저 2019년 6월 친서는 북미 간 '하노이 노딜'로 분위기가 냉랭해진 후 100여 일 뒤에 작성됐습니다.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 생일인 6월 14일과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1주년을 기념해 보낸 것입니다. '영광', '마법의 힘', '환상적인 순간' 같은 장식적인 수사들이 등장합니다.
"각하께 이런 편지를 보낼 수 있는 것조차 영광"
"우리 사이의 깊고 특별한 우정은 북미 관계의 진전을 이끄는 마법의 힘으로 작용해…"
"우리가 마주 앉아 위대한 일이 일어나도록 할 그 날이 조만간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중략) 그것은 또 하나의 환상적인 순간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당신을 존경하는 마음은 절대 변치 않을 것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편지가 작성된 다음 날인 지난해 6월 11일 기자들에게 바로 "김정은에게서 아름다운 편지를 받았다"고 말했는데요. 가히 트럼프 대통령이 자랑하고 싶어 할만한 내용들이었던 것입니다. 이후 트럼프의 트위터 제안을 계기로 전격 성사된 남·북·미 판문점 회동도 이 같은 '친서 교감'이 미리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싱가포르에서 열린 1차 북미정상회담 반년 뒤인 2018년 12월에 쓴 편지도 공개됐는데, 표현의 화려함은 이 편지도 만만치 않습니다. '영광의 재현', '판타지 영화' 등의 어구가 등장합니다.
"아름답고 성스러운 곳에서 각하의 손을 굳게 잡았던 역사적 순간을 잊을 수 없고 그날의 영광을 재현하기를 희망합니다"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저와 각하의 또 다른 역사적 만남을 그리 멀지않은 미래에 전세계가 다시 한 번 보게 될 것입니다"
또 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을 '각하(your excellency)'라고 높여 부르는데, 2018년의 편지에는 '각하' 표현이 총 9번이나 등장합니다. 정상 간 친서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 '극존칭'입니다.
■ '과장'엔 '과장'으로…트럼프 성향 감안한 전략적 친서?
트럼프는 '과장 화법'의 대명사가 된 정치인입니다. 김 위원장의 친서를 보면, 이같은 트럼프 대통령의 화법에 김 위원장 역시 '과장'으로 대해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 CIA 분석가들은 이번에 공개된 김 위원장의 편지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역사적 중심 무대에 오른 느낌을 주면서, 정확한 아첨의 혼합을 찾아낸 기술에 경탄했다"면서 "트럼프가 김정은의 아첨에 완전히 넘어갔다"고 말했다고 우드워드는 전했습니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과 교수도 "북한의 고도의 외교·정치 행위가 담겨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소위 '비위 맞춰주는 것'을 좋아하는 트럼프의 성향을 고려한 정치적 행위라는 것입니다.
김 위원장의 과장화법은 외교적 설득용이기도 하지만, 평소 자기과시적인 그의 성향도 어느 정도 반영됐을 것으로 보입니다.
우드워드 책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고모부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을 어떻게 살해했는지를 자랑했습니다. 자신이 체제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점을 내세우기 위해 한 행위로 보입니다.
■ 공개석상에선 '쿨'하게, 편지로는 '구애'?
김 위원장 입장에서는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으로부터 이른바 '노딜 굴욕'을 당했습니다. 이후 같은 해 4월에 열린 최고인민회의 등에서 미국 측에 강한 불쾌감을 표시했는데, 비슷한 시기 쓴 친서에서는 이와는 사뭇 다른 태도여서 흥미롭습니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6월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103일 전 하노이에서 함께한 모든 순간이 소중한 추억으로 남은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고 회담을 회고합니다.
앞서 같은 해 4월에 열린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만 하더라도 "미국이 전혀 실현 불가능한 방법에 대해서만 머리를 굴리고 회담장에 찾아왔다"면서 "티끌만한 양보나 타협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는데요.
미국과의 회담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공개석상에서의 '쿨한' 태도와는 달리 친서에서는 '구애'에 가까운 표현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미국에 3차 정상회담을 요청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래와 같은 내용도 나옵니다.
"당신을 향한 나의 확고한 존경 속에 간직하고 있는 그러한 소중한 기억은 언젠가 미래에 우리가 다시 서로를 향해 걸어갈 때 내가 발걸음을 내딛게 하는 추진력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첫 만남에서 당신이 보여주신 의지와 결정을 여전히 존경하고 거기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상호 신뢰에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려는 의지와 더불어 위대한 일이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마주앉을 그 날이 조만간 올 것으로 믿습니다."
우드워드는 이 표현들에 대해 "'원탁의 기사단'이나 아마도 구혼자들이 언급할 것 같은 개인적인 충성서약으로 가득 차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김정은 위원장의 '절실함'이 묻어난 표현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임 교수는 "북한은 2018년 4월 전원회의에서 경제 건설에 집중하겠다는 노선을 새로 도입한 이후, 대북제재 완화를 이끌어내려면 트럼프 설득이 최선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트럼프 설득에 대한 절실함이 반영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트럼프와의 담판을 위해 '최선을 다한' 흔적이라는 것입니다.
북한이 정상 간 외교에 의존하는 '탑다운' 방식에 얼마나 집중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에도 김 위원장은 여전히 트럼프 대통령의 결단에 의존했던 것입니다.
■ 트럼프, 불쑥 "김정은 똑똑하다"…친서 공개의 결말은?
두 정상 간의 친서 27통 내용을 모두 담은 우드워드의 신간 '격노'는 오는 15일 공식 출간됩니다. 친서 추가 공개에 따른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 내부에서 이 책의 출간 사실을 알게 된다면, '최고존엄'이 미국에 저자세를 취한 게 아니냐는 비난이 확산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 교수는 "신성성과 불가침성의 최고존엄이 '제국주의의 수괴'로 여겨온 미국의 대통령의 비위를 맞추려 하는 것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난 곤혹스러운 상황"이라면서 "최대한 이런 정보가 내부에 들어오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우드워드를 향해 "김정은을 조롱하지 말라. 당신의 조롱으로 핵전쟁에 들어서고 싶지 않다"고 사전에 경고하기도 했는데요.
트럼프 대통령은 오늘(현지시각 10일) 불쑥 김 위원장에 대해 "매우 똑똑하다. 우리는 잘 지낸다"고 강조했습니다. 트위터를 통해서는 "김정은은 건강하다. 절대 그를 과소평가하지 말라"고도 밝혔습니다. 이런 뜬금없는 '김정은 칭찬'은 우드워드에 의한 친서 공개가 김 위원장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나온 것으로도 분석되고 있습니다.
향후 북한 비핵화 협상과 북한의 도발 수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분석들도 나옵니다.
박원곤 교수는 "미국 대선 전에 적절한 수준에서 북한이 미국에 대한 압력을 가할 것"이라며 "다음 달 10일 당 창건일에는 화성 계열 미사일 등을 보여줄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카네기국제평화재단(CEIP)의 동아시아 안보 전문가 캐서린 보토는 미국의소리(VOA)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김 위원장의 서신 공개를 북미회담 거부 사유로 언급할 수도 있다"고도 말했습니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북한이 다운식 정상 외교의 한계를 더욱 깨닫는 계기일 수 있다"면서 "트럼프에 대한 설득만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향후 위축되고, 대신 다른 다양한 층위의 접근 등으로 북미협상의 양태가 다변화될 수 있다"고 내다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