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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에너지 악순환 끊는 데 도움 보태야" "북한 주민들은 매년 겨울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어요. 연탄지원은 남북의 정(情)을 통하는 일입니다." '따뜻한 한반도 사랑의 연탄나눔운동' 원기준(45.목사) 사무총장은 24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북한에 연탄을 보내는 운동을 남북 사이 혈관이 이어져 있음을 확인하는 '통정(通情)'에 비유했다. 연탄나눔운동은 2004년 설립 후 지금까지 300만 장의 연탄을 금강산과 개성 지역에 꾸준히 지원해왔다.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핵실험 등 악재가 잇따랐던 올해만 220만 장의 연탄이 군사분계선(DMZ)을 넘었다. 원 사무총장은 북측 관계자들로부터 "어려움 속에서 함께 해줘 인민들이 고마워한다", "겨울에는 연탄이 쌀보다 귀하다", "연탄 때문에 나무를 보존할 수 있어 다행이다" 등의 말을 듣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3년 간 40여 차례 북한을 다녀온 원 사무총장은 "정세에 영향을 받아 어려움이 있지만 북측이 적극적으로 협력 의사를 밝히고 있다"면서 "내년부터는 주민에게 분배 장면을 확인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올해 미사일.핵 문제가 나왔을 때 사실 (연탄 지원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겨울을 앞두고 연탄만큼은 수긍하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국내에서 매년 연탄 소비량은 6억 장 정도인데 이 가운데 북녘 주민에 보내지는 220만 장은 '퍼주기'가 아닌, 정을 보내는 의미로 이해할 넉넉함을 믿었다는 말이다. 냉방에서 겨울을 나야하는 북녘 동포에게 연탄은 사상, 이념을 떠나 인간적인 도리라는 주장. "사실 석탄 매장량이나 연간 생산량은 북측이 우리보다 많아요. 하지만 석유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석탄은 화력발전소로 향하고 있어 일반 가정에서 '석탄가루'를 공급받기 힘들죠. 여기에다 전기 사정이 안 좋아 석탄을 캘 수 없고, 석탄이 없으니 전기를 못 만들고..북한은 지금 에너지 악순환을 겪고 있어요. 결국 북녘의 민가 주변은 대부분 민둥산이고 40%의 산림이 훼손된 상태입니다." 원 사무총장은 북한에선 연간 가정용과 발전용을 합해 8천만t의 석탄이 필요하지만 2천만t 정도밖에 캐지 못한다며 "평양과 탄광 주변이나 석탄가루를 공급받는데, 나머지 추위에 그대로 노출된 어린이나 노인 등 취약계층은 어떻게 하느냐"고 안타까워 했다. 연탄나눔운동은 소규모나마 북한에서 식수사업을 하는 등 '에너지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데 힘을 보태고 있다. 원 사무총장이 연탄 지원사업을 시작하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그는 1996년 목회 활동을 하던 태백시 교회를 중심으로 '북한 동포 석탄보내기 운동본부'를 결성해 모금에 나섰다. 그러나 그 해 9월 북한 잠수함이 강릉 앞바다에 좌초되는 사건이 터지면서 '1차 시도' 실패. '2차 시도'는 6.15 남북공동성명 이후 해빙 분위기가 무르익은 2002년 있었다. 원 사무총장은 평양을 방문, 민간 에너지 협력 차원에서 석탄 지원의 뜻을 북측 관계자에 전했다. 그러나 당시 북한은 남한 정부에 전력을 보내달라고 제안하던 시기로, '남한 정부가 전기를 안 보내주는 핑계가 될까 곤란하다'는 입장을 들었다. 그나마 차선책으로 대북 지원단체 사업장에 석탄을 보내는 방안에 합의했지만 화물선으로 2천t의 석탄을 보내는 데 6만달러가 들어 '배보다 배꼽이 큰' 지원을 포기해야만 했다. 두 차례 실패 후 2004년 대한석탄공사로부터 희소식이 날아왔다. 석탄이 아닌 연탄 보내기 운동에 동참하겠다는 것. 석탄공사 노동자들의 쌈짓돈으로 마련된 7천만원을 종자돈으로 삼자 모금액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연탄이라는 '사랑의 아이콘'이 사람들에게 아련한 추억과 애틋한 마음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 원 사무총장의 자평이다. 이후 남한의 취약계층과 북녘에 동시에 연탄을 보내는 운동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졌고 지금은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자원봉사 프로그램으로 정착됐다. 지금껏 연탄나눔운동에 참여한 후원 회원만 10만명. 원 사무총장은 연탄나눔운동을 펴기까지 많은 개인적으로도 많은 굴곡을 겪었다. 그는 1982년 총신대 신학생 신분으로 태백 탄광촌에 봉사활동을 나갔다가 탄광 노동자들이 놓인 열악한 환경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1985년 태백시의 한 교회 복지기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노동자의 산업재해를 상담하고 한글반을 운영하다 1986년 군 보안대에 간첩 혐의로 끌려갔다. 곧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사회에서는 그에게 '간첩'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린 상태. 교회에서 쫓겨난 원 사무총장은 이듬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 태백인권위에서 인권.노동운동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년 6개월을 복역했고 1990년대에는 폐광지역을 살리자는 지역운동에 뛰어들었다. 1995년 '폐광지역개발지원에관한특별법'이 제정됐고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한 '고육책'으로 카지노를 받아들였지만 도박성 논란에 휩싸였다. 게다가 강원랜드의 혜택을 받은 정선군과 그렇지 않은 태백시 사이 지역 감정도 불거졌고, 비난의 화살은 원 사무총장을 향했다. 원 사무총장은 "카지노를 정선에 팔아먹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고통스러웠다"면서 "지금은 '전국구 캠페인'을 펴고 있지만 태백은 변함없이 제2의 고향"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주말마다 부인과 세 아들이 있는 태백에 내려가 목회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어떤 때 보람을 느끼느냐는 질문에 "북녘 마을에 하얀 연탄재가 나뒹구는 모습을 볼 때 뭔가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며 "연탄 나눔이 필요 없을 때까지 일하고 싶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