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 사업, ‘갈등 조정’ 외면한 언론_포커를 만든 사람_krv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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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국제 과학 비즈니스 벨트 입지가 대전으로 확정되면서 탈락된 지역의 지자체와 정치인들의 반발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서 동남권 신공항, LH본사 이전까지 정부의 국책 사업의 입지 선정 과정을 놓고 논란이 계속됐는데요.

이 사안들을 주목해온 언론이 사태의 본질은 접어두고 정치적인 대결로 부각시키면서 갈등을 키웠다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국책 사업과 관련한 언론보도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봅니다. 박진현 기자 나와있습니다.

<질문> 박진현 기자.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는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공약으로 추진됐지만, (세종시가 아닌) 대전 대덕 특구로 결정되기까지 많은 진통이 있었죠?

<답변>

네, 그렇습니다. 과학벨트는 이명박 정부의 대표적인 과학 분야 공약이었지만 정부 부처의 세종시 이전과 맞물려 진통을 겪어왔습니다.

지난해 1월. 정부는 정부부처의 세종시 이전을 취소하는 대신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를 세종시에 건설하겠다는 세종시 수정안을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녹취> 정운찬(전 총리/2010.1.11) : "정부가 구상 중인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의 핵심시설을 세종시에 건설하려는 연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세종시 수정안이 국회에서 부결됐고 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공약을 뒤집는 듯 한 발언을 하면서 과학 벨트 입지 문제는 지역간 갈등 확산과 정치적 논란의 대상이 됐습니다.

<녹취> 이 대통령(2011.2.1) : “공약집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선거 유세를 충청도에 가서 이야기했으니까 내가 관심이 많았겠지요.”

충청권은 곧바로 반발했고 다른 지역은 유치전에 들어갔습니다.

정부는 지난해 말에 통과된 과학벨트 특별법에 따라 입지 선정을 위해 과학벨트위원회를 꾸렸고, 후보지를 압축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지난 16일.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입지가 대전으로 확정됐습니다.

<녹취> "최종 후보지 5곳에 대한 평가 결과, 대전 대덕은 월등히 높은 75점을 받아 거점지구로 확정됐습니다."

<녹취> "여기엔 원자의 세계를 다루는 중이온가속기와 핵심연구단지인 기초과학연구원이 들어섭니다."

<녹취> 박현석 : "거점 지구를 뒷받침할 기능지구는 대덕단지와 가까운 청원, 연기군과 천안시가 선정됐습니다."

또 기초과학연구원의 연구단 50곳 가운데 상당수는 막판까지 경합을 벌였던 광주와, 경북권에 집중 배치하기로 했습니다.

당초 계획보다 예산도 증액됐습니다.

<인터뷰> 민동필 : “한국 과학사의 큰 획을 긋는 일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의 기초과학이 세계 과학 발전에 도움이 되고 우리 스스로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이죠.”

<질문> 결과적으로 보면 대통령의 공약대로 된 것인데 이렇게 될 바에야 굳이 사회적 갈등을 빚어면서까지 해야만 했을까 의문이 드는데... 그동안 우리 언론은 제대로 역할을 했는지 궁금해지는 군요.

<답변>

네, 서양 속담에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학비지니스벨트가 제자리를 잡았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었지만 지역갈등이라는 계산하기 힘든 사회적 비용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우리 언론은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지난 2009년 1월. 정부는 과학벨트 추진을 위한 종합 계획을 수립합니다.

그러나 소요예산 3조 5천억 원이 필요 이상으로 부각됩니다.

대부분의 예산은 과학 연구에 필요한 건물을 짓는다든지 장비 구매와 인건비로 사용됨에도 마치 지역 발전에 투자되는 듯한 인상을 심어줍니다.

이후 과학벨트 입지 선정이 구체화되는 시점에도 언론의 이러한 논조는 계속됩니다.

과학자들은 이 부분에서 기초과학 발전을 위한 과학 벨트에 대한 오해가 시작됐을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인터뷰> 홍승우(성균관대학교 물리학과) : “과학벨트는 국가 과학 기술 발전이라는 큰 프로젝트인데 마치 지역 발전을 위한 어떤 것인 양 비쳐진 것이 조금 아쉽습니다.”

미디어 비평은 지난달부터 이번 주까지 5대 일간지의 과학벨트 관련 기사를 분석해봤습니다.

경제적 관점을 부각시키거나 이로 인한 지자체의 유치 경쟁을 보도한 기사는 128건인데 비해 과학벨트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기사는 11건에 불과했습니다.

심지어 대전으로 입지가 선정되자 다음날 일부 신문에서는 해당 지역의 부동산 뉴스까지 등장합니다.

결국 과학벨트가 국가의 과학 기술 발전을 준비하는 백년대계라는 본질은 사라지고 지역 발전과 맞물린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으로 축소된 셈입니다.

이처럼 과학 벨트를 해당 지역의 발전을 위한 시설물인 것처럼 평가했던 언론은 선정 결과를 승복하지 않은 지자체들의 격한 반응을 여과 없이 전달합니다.

<녹취> 김민정 : "경북과 울산.대구의 과학 벨트 범시도민 유치위원회가 주최한 결의대회는 정부 성토장이 됐습니다. 혈서까지 써가며 강하게 반발합니다."

<녹취> 오해정 : "도지사는 이틀째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정부를 상대로 소송도 불사한다는 입장입니다."

<녹취> 김형주 : "경북도와 의회는 현재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경주 방사성폐기물처분장 반납까지 거론하며 입지 선정 백지화를 요구했습니다.”

혈서와 단식 그리고 방폐장 반납이라는 자극적인 단어들로 갈등의 골이 깊어진다는 것을 강조할 뿐입니다.

갈등을 조정해야할 언론이 막상 지역 갈등 앞에서는 방관자에 머무르는 한계를 보인 것입니다.

<질문> 이번에 입지 선정을 공식 발표하던 날이 지난 16일이었는데 이미 이틀전인 14일 결과가 유출됐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 갈등이 더 크게 분출된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답변>

네, 그렇습니다.

국민적 관심사가 높은 것을 취재하고 먼저 보도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기자의 본업입니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는 특종 보도가 오히려 갈등을 부추긴 면이 없지 않습니다.

과학벨트 최종입지 선정 공식 발표를 이틀 앞둔 지난 14일.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과학벨트 입지가 대전 대덕단지로 확정됐다는 특종 기사를 1면에 보도합니다.

여기에 조선일보는 과학벨트가 대전 대덕에 들어서는 의미와 과제 등을 해설기사로 실었습니다.

결국, 이들 신문뿐 아니라 거의 모든 언론은 정치권 등의 말을 빌어, 선정위원회의 최종 심사가 있기 전에 입지가 미리 결정된 것으로 보도하게 됩니다.

<녹취> 최문종 : “여권 고위 관계자는 과학 벨트 입지가 대전 대덕 연구단지로 결정됐으며, 여기에 기초과학 연구원과 중이온 가속기 등 핵심시설을 배치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발표 내용과 거의 일치한 조선과 중앙의 보도는 유력 정치인의 발언을 인용했습니다.

여권 핵심 관계자는 13일 “대전시 대덕특구가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거점지구로 확정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과학벨트와 관련한 보도에서 정치인은 단골 손님이었습니다.

이상득 의원, 정두언 최고위원,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 대표 그리고 최근에 박성효 한나라당 최고위원까지 과학벨트와 관련한 뼈있는 발언을 했고 언론은 다양한 해석을 곁들여 보도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무명의 유력 정치인이 등장함에 따라 결과적으로 과학벨트가 이른바 정치벨트임을 확인시켜 준 셈입니다.

<녹취> 최고운 : “광주광역시도 정부의 입지 선정 방식에 문제가 있다며 결과에 승복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습니다.

과학적 논리가 아니라 정치 논리로 입지가 선정됐다는 논란이 일자 특종 기사를 작성한 중앙일보도 결론이 먼저 유출된 점에 대해서는 문제라고 말합니다.

동남권 신공항처럼 이번에도 먼저 결론이 유출돼 논란의 빌미를 제공한 건 문제다.

유치 경쟁이 뜨거웠던 만큼 과학벨트를 주로 담당한 과학기자단도 정치적 논란과 지역갈등이 심화될 수 있다는 이유로 지난 11일부터 16일까지 입지 선정 결과와 관련해 보도유예 즉 엠바고를 결정한바 있습니다.

따라서 과학 기자단은 엠바고를 어긴 조선일보를 영구제명하고 중앙일보의 경우는 1년간 출입 정지를 결정한 상탭니다.

일련의 보도를 지켜본 과학자들도 정치인들이 주인공이 되면서 과학벨트가 정치벨트로 비쳐진 부분을 가장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민동필(기초과학회 이사장) : “과학자들이 모든 사안을 논의하고 결정했는데 마치 그런 노력이 없었던 것처럼 비춰져서 못내 아쉽고 섭섭합니다.”

<질문> 박 기자! 올들어 동남권 신공항이나 LH본사 이전 문제 등 국책 사업과 관련한 중요한 결정들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이번 과학벨트와 비슷한 과정을 겪는 것 같아요. 어떤 특별한 유형이 발견됩니까?

<답변>

네, 말씀하신대로 성격도 다르고 결론도 제각각 다르지만 진행되는 모습은 매우 닮아있습니다.

지난 13일 국토해양부는 LH 즉 한국토지주택공사 본사를 경남 진주로 일괄 이전하는 방안을 확정 발표했습니다.

유치 경쟁을 벌였던 전북 전주에는 국민연금공단을 옮기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과학벨트와 마찬가지로 확정 발표 전 유력 관계자의 말을 인용한 기사가 먼저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1일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다"고 전제한 뒤 ”내부 검토과정에 비처볼 때 (진주로의) 일괄 이전이 더 수긍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난 3월 말.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 선언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실사가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익명의 여권 실세들의 백지화 발언들이 기사화됐고 이는 그대로 현실화 됐던 것입니다.

언론은 이어서 관련 의원들의 반발과 지자체의 반발을 다루고 마지막으로는 정부와 청와대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집니다.

한마디로 언론 스스로의 가치판단은 볼 수 없고 정치인들의 입으로 시작해서 정치인들의 입으로 끝나는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질문> 박기자! 이런 국책 사업을 보도함에서 올바른 자세는 결국은 무엇일까요?

<답변> 국책 사업 자체가 어떻게 보면 정치적 결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갈등이 항상 내재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부는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원칙과 기준을 마련해야 할 것이고 우리 언론은 속보 경쟁 보다는 공정한 게임이 될 수 있도록 정부의 원칙과 기준이 제대로 지켜지는지를 감시해야 할 것입니다.

과학벨트와 관련한 보도 가운데 일부는 이러한 국책 사업과 관련한 갈등을 없애기 위한 건설적인 제안을 하고 있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녹취> 김윤수 : “2004년 만들어진 지역발전 투자협약.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국가 사업의 내용과 투자분담에 관한 협약을 체결할 수 있다고 돼 있습니다. 묻지마 유치경쟁을 막기 위해 비용을 지방 자치단체도 나눠서 내자는 취지인데 7년동안 단 한번도 적용된 적이 없습니다.”

사설 프랑스도 이 때문에 고민하다가 중앙 정부는 일부만 지원하고, 지자체가 대부분의 재원을 부담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해결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제도적 개선을 촉구하는데 그칠 뿐입니다.

보다 근원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국책사업은 대부분 공약으로 시작되는 만큼 이에 대한 세밀한 검증이 우선돼야한다는 것입니다.

<인터뷰> 신율(명지대 정치학 교수) :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아스러운 공약들이 많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공약이 나오면 사실은 언론이 감시의 기능을 철두철미하게 발휘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선거에서 이기는 것도 좋지만 그 과정이라는 것을 우리가 중시하는사회를 만들 필용성에 입각했을 때 말도 안되는 공약이다라는 것들을 자꾸 얘기를 해줘야지 정치권에서 말도 않되는 공약을 만들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요."

최근 일련의 국책 사업과 관련해 언론 뿐만 아니라 국민들도 세심하지 못한 정치 공약이 얼마나 많은 사회적 비용을 들게 하는지를 온몸으로 경험했습니다.

내년은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고 대통령 선거가 있는 중요한 해입니다.

따라서 난무하게 될 정치 공약을 언론은 인력과 예산 탓만 할 것이 아니라 국민의 입장에서 제대로 검증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