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에 물음표를 던진 소녀의 등장…오정희 ‘중국인 거리’_대통령 경호원 연봉은 얼마_krv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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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우리 시대를 빛낸 소설을 만나보는 시간.

오늘 소개해드릴 작품은 10살 소녀의 혹독한 성장통을 담은 오정희 작가의 단편소설 <중국인 거리>입니다.

6·25전쟁 직후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여성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수려한 문체로 그려내 우리 단편 미학의 정수를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김지선 기자가 소개합니다.

[리포트]

['중국인 거리' 中 : "해안촌 혹은 중국인 거리라고도 불리는 우리 동네는 겨우내 북풍이 실어나르는 탄가루로 그늘지고, 거무죽죽한 공기 속에 해는 낮달처럼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10살짜리 아이가 가족과 함께 이사 온 곳.

낯선 이들이 모여 사는 동네, 인천 '중국인 거리'입니다.

한국전쟁 직후 폐허가 된 땅.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모여 이웃이 된 마을.

이곳에서 자란 소녀의 성장통을 그린 작품,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입니다.

유년 시절을 인천에서 보낸 작가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오정희/소설가 : '내가 무엇인가' 라는 것을 생각할 때 항상 거기로 돌아가 보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이 '중국인 거리'도 저의 성장기로 그렇게 썼던 것 같습니다."]

소녀가 본 세상은 황폐하고, 냉혹합니다.

앞집 사는 '양공주' 매기 언니는 미군의 폭력에 목숨을 잃고, 엄마는 또 아이를 낳게 된다면 죽을 것처럼 보이는 데도 여덟 번째 아이까지 임신한 데다,

동생에게 남편을 뺏긴 할머니는 중풍을 앓다 세상을 떠납니다.

[오정희/소설가 : "제도라든가 습관이라든가 가치관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상당히 가부장적인 것에 중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여성들이 받는 억압은 더 컸을 것이고...이런 것들이 그 시절하고 그렇게 크게 다를까요?"]

이 영민한 소녀는 그래서 아이를 낳는 여성의 '동물적인 삶'을 동정하는 동시에 서서히 여성으로 변해가는 자신의 몸이 당혹스럽고 두렵습니다.

["인생이란...나는 중얼거렸다. 알 수 없는, 복잡하고 분명치 않은 색채로 뒤범벅된 혼란에 가득 찬 어제와 오늘과 수없이 다가올 내일들을 뭉뚱그릴 한마디의 말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러나 불우하고 누추한 세상에서도 묵은 나무에서 새순이 돋아오르듯 아이는 부단히 애쓰며 한 뼘씩 성장해 지금과는 다른,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오정희 작가는 수려한 문체로 꼼꼼히 수를 놓듯 아이의 혹독하고 외로운 성장통을 담담하게 그렸습니다.

[우찬제/문학평론가 : "단편 미학의 정수를 보인 작품이라고 얘기되고 있어요. 여성 문제에 대해서 '이게 뭐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라고 근본적인 첫 질문을 던지게 된 것, 이런 것은 오정희가 새로운 분기점을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199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쏟아져나온 여성 작가들이 '우리는 오정희한테서 나왔다'는 자기 고백을 하고, 앞으로도 계속 하게 될 이유입니다.

[오정희/소설가 : "(이 주인공을 다시 만난다면 혹시 건네주고 싶은 말이 있으세요?) 보통 '꼭 안아주고 싶어' 이렇게 말하겠지만 저는 그냥 '뚜벅뚜벅 걸어가 봐. 네 마음대로 가 봐. 많이 슬퍼하고 많이 아파하고 그래도 괜찮아...'"]

KBS 뉴스 김지선입니다.

촬영기자:조승연 류재현/그래픽:김현갑/아역배우:이다혜/사진제공:인천시교육청 화도진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