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모리배·우익 테러에 나라 골병”_바우루 포커클럽_krv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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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명의 위인이 어린 아희를 세워두고 줄로 허리를 감아 양끝에서 서로 잡아당기니 필경 두 사람 중 한 명이 질 것이나 그새 아희는 시체로 화합니다." 해방 직후 미 군정의 신탁통치 아래 있던 남한 사회의 혼란상을 바라보는 한국 민중의 현실인식과 비판의 목소리를 여과 없이 담은 편지가 63년 만에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16일 서울대 국사학과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인 정무용씨는 1947년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방한한 웨드마이어 사절단이 받은 '한국인들이 보낸 편지' 450여 통을 공개했다. 무명의 한국인들이 보낸 2천여 장 분량의 이 편지들은 정씨와 지도교수인 국사학과 정용욱 교수가 지난 2006년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찾아냈다. 편지들을 살펴보면 논리정연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친 내용도 있지만, 상당수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민초(民草)들이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편지지도 이른바 엘리트들이 쓰는 질 좋은 종이가 아니라 갱지나 이면지가 많고, 삐뚤삐뚤한 글씨로 한두 줄만 간신히 적은 것도 있다. 이들 민초는 생산시설을 독점하고 부패한 배급행정을 이용해 부당이득을 취하는 모리배들 때문에 경제파탄과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며 대책을 호소했다. 일부는 반탁운동 참여와 미곡 수집을 강요하려고 무차별적 테러를 자행한 우익 청년단과 이를 방조하는 경찰을 사회불안의 원인으로 꼽고 구체적인 대책을 촉구하기도 했다. 정씨는 "편지를 쓴 민중은 특히 사회·경제적 불안을 가져오는 모리배와 우익 테러단체를 반민족세력, 즉 청산되지 않은 친일파와 동일시했다"고 지적했다. 웨드마이어 사절단 역시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냉전 대결 구도 속에 공산주의 척결을 위해 우익을 남한 반공정부의 대표자로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정씨는 설명했다. 실제로 미 상원군사외교위원회는 1951년 웨드마이어 보고서 한국편을 발간했지만, '우익이 한국 민중의 의사를 대변하지 못한다'는 부분은 삭제했다가 1972년에야 삭제부분이 포함된 한국편을 재발간, 공개했다. 정씨는 이 편지들을 분석해 '1947년 웨드마이어 사절단의 방한과 한국인의 대응'이란 논문으로 최근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