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지켜주세요” 두 살배기 참변에 내걸린 그림_화살표를 슬롯으로 이동하는 단축키_krv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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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를 지켜주세요"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 한 아파트 단지 인근. 어린이보호구역을 알리는 울타리에 그림들이 내걸렸습니다.

지난 17일 유모차를 끈 어머니와 세 남매가 횡단보도를 건너다 화물차에 치여 두 살배기 둘째가 숨진 현장입니다.

그림에는 어린이들이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습들이 담겼습니다. 그림 속 아이들은 신호를 지키며 한 손을 번쩍 들거나 어른들의 손을 잡고 있습니다.

'손을 들고 건너요' '좌우를 꼭 살펴요' 등 어린이 스스로 안전을 지키기 위한 문구를 담았습니다.


어린이의 시각으로 어른들에게 남기는 당부도 잊지 않았습니다.


횡단보도 앞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달팽이 차' 그림과 '학교 앞에선 거북이처럼'과 같은 표현을 통해서입니다.

삐뚤빼뚤한 글씨지만, '교통안전 우리는 아는데 왜 몰라요?'라며 답답함을 표시하거나 '어린이 보호구역 우리를 지켜주세요'라는 무거운 메시지를 남긴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림을 그린 아이들은 사고 현장 인근의 유치원생들입니다.

부모를 통해 소식을 접하고는 비슷한 사고가 반복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선생님과 함께 그린 그림입니다. 주변을 지나던 주민들은 "부끄럽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 화물차 운전자의 부주의…유모차에 양보 안 한 맞은편 운전자들

이번 사고의 주원인은 화물차 운전자의 부주의였습니다.

경찰 조사 결과 화물차 운전자는 일시정지선을 무시한 채 횡단보도 가까이에 차를 정차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또 전방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채 약 40m 앞 교차로의 신호가 바뀌자 그대로 차를 주행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사고 지점은 신호등이 없는 곳으로 지난 5월 초등학생이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여 다친 장소였습니다.


사고 현장의 CCTV에는 우리 사회의 차량 중심 운전 문화가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사고가 나기 전 횡단보도 한가운데에는 유모차를 끈 어머니가 서 있습니다.

어머니는 길을 건너려고 하지만 화물차 반대편 도로의 어느 차량도 잠시 정차해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약 10초가 지나고 화물차가 움직이면서 두 살배기가 숨지는 참변으로 이어졌습니다.

사고 현장에서 화물차 운전자를 체포한 경찰은 이른바 '민식이법'으로 불리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어린이 치사상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법원은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해 영장을 발부했습니다.

경찰은 사고 직전 일가족이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게 양보하지 않은 맞은편 운전자들도 도로교통법 제27조(보행자의 보호)를 위반한 것으로 보고 범칙금을 부과할 예정입니다. 승용차 기준 12만원입니다.

다만 이들 운전자들에게 사고의 직접적인 책임을 묻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게 경찰의 판단입니다.


■ 1년 전 어린이보호구역 대책 내놓은 정부…바뀌지 않은 현장

정부는 올해 초 '어린이 보호구역 교통안전 강화대책'을 관계부처 합동으로 발표한 적 있습니다.

대통령 주재로 열린 올해 첫 국무회의 자리에서인데, 민식이법 통과 등 어린이 보호구역안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커지자 내놓은 대책이었습니다.

당시 정부가 내놓은 대책의 핵심 내용은 어린이 보호구역 안전시설 확충과 어린이 우선 교통문화 정착 등이었습니다.

진영 행정안전부 장관은 당시 "어린이 사망사고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정부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적극 추진해 나가겠다"며 운전자들에게도 주의를 당부했습니다.

1년 가까이 지났지만 또다시 두 살배기가 숨지는 참변이 발생했습니다.

현장의 시설은 일부 확충됐지만, 안전 무시 관행을 뿌리 뽑고, 어린이 우선 교통 문화를 정착시키겠다는 정부의 약속은 아직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잇따르는 어린이보호구역 내 사고에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 운전자들의 차량 중심 운전 문화도 여전합니다.

■"교통 안전 시설 확충보다 '보행자 중심' 의식부터"

경찰과 광주광역시는 이번 사고 이후 현장에 안전 시설물을 보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신호등을 설치하거나 정차금지지대를 그려 표시하는 내용입니다. 일부 주민들의 요구를 토대로 한 후속조치입니다.

그러나 참극을 막기 위해서는 시설이 아닌 운전자들의 의식 개선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목소리입니다. 특히 보행자가 많은 도로 주변과 어린이보호구역에서는 차가 아닌 보행자가 중심이 되는 운전 문화를 만들고, 운전면허를 따는 과정에 안전교육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백승권 광주시 교통문화연수원 사무부장은 "우리의 운전면허 취득 과정은 운전 기능을 익히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횡단보도에서는 일단 차를 일시정지하는 선진국처럼 보행자를 우선하는 교통문화를 만들기 위한 고민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