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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랑 사자랑 싸우면 누가 이겨?"

어린 조카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쉽게 답하실 수 있으신가. 그렇지 않다. 누구라도 비슷할 것이다.

우리도 아이일 때는 같은 질문을 했고, 어디서도 시원한 답을 못 들었다.

질문을 던진 조카가 어른이 돼도 비슷할 것이다. 여전히 답하기 힘들 것이다.

용호상박일 듯한 대결은 본능적인 호기심을 끈다. 더구나 계속 되풀이된다면 호기심은 배가된다.

먹거리 시장에도 이런 흥미로운 대결이 있다. 누가 이길지 붙어보기 전엔 알 수 없다. 양쪽 모두 강자이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일합이 있었고, 지금 또 다른 일합이 진행 중이다.

■ 햇반 전쟁 : 햇반이 뭐라고…

2022년 12월. CJ제일제당은 쿠팡에 납품을 중단한다. 햇반과 비비고 등 대표적 식품 브랜드 공급을 모두 끊었다.

쿠팡은 전자상거래 1등. CJ제일제당은 식품 1등. 유통과 식품의 대표기업이 전면전에 나선 것이다.

쿠팡 사이트에서 ‘햇반’을 검색한 결과. 쿠팡이 직접 배송하는 즉석밥 목록에 CJ제일제당 ‘햇반’은 없다.
도화선은 '납품가'였다.

쿠팡은 CJ제일제당에 납품 가격을 더 낮춰달라고 했다. 그래야 소비자에게 할인할 여력이 생긴다는 논리였다. 전자상거래 1위라는 자신감을 등에 업은 요구였다.

CJ제일제당은 거부했다. 쿠팡뿐 아니라 다른 전자상거래나 대형마트에도 유통하는데, 쿠팡에만 더 싸게 줄 수는 없다는 논리였다. 상품 경쟁력에 대한 자신감이 깔렸다.

7개월이 지났는데도 이 전쟁은 끝날 기미가 없다. 오히려 확전 양상이다.

쿠팡은 지난 24일 CJ의 다른 계열사인 CJ올리브영을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했다.

뷰티시장의 최강자 CJ올리브영이 경쟁력 있는 미용 상품의 쿠팡 납품을 방해했다는 게 쿠팡의 주장이다. CJ올리브영은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하고 있다. 쿠팡과 CJ그룹이 맞붙는 모양새로 커졌다.

이쯤되면 궁금해진다. 햇반이 뭐라고, 알만한 기업들이 이렇게까지 다투는 걸까.

햇반 전쟁의 핵심은 햇반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짜 중요한 건 따로 있다. 그걸 위한 싸움이다.

잠시, 2010년으로 거슬러 가보자.

■ 신라면 전쟁 : 선수만 달라졌을 뿐…

당시에도 대형마트업계의 화두는 '최저가'였다. 이마트는 오픈 프라이스(Open Price) 정책을 적극 추진한다.

오픈 프라이스? 열린 가격? 가격을 열어놓고 이마트가 마음대로 할인하겠다는 방침이었다. 이마트는 라면 시장 1위 신라면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마트는 신라면을 그 어느 곳보다 싸게 팔겠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한다. 전국 최저가의 신라면으로 고객을 끌어 모으면, 다른 상품 매출도 자연스레 늘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농심은 발끈한다. 누구 맘대로 가격을 정하냐며 반격에 나선다. 이마트에 신라면 납품을 끊은 것이다. 전국 이마트 매대에서 신라면만 텅텅 비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이마트는 대형마트 1등. 농심은 라면 1등. 유통과 식품 진영 대표선수들의 대격돌이었다.

2023년 햇반 전쟁의 데자뷔인 셈이다. 링 위에 오른 선수만 달라졌을 뿐이다.

■ 가격은 누구의 영토일까

햇반 전쟁과 신라면 전쟁. 무엇을 위한 전쟁일까.

핵심은 가격결정권이다. 가격결정권? 이렇게 생각하면 쉽다.

A라는 히트상품이 있다. A의 소비자 가격은 10,000원이다. 판매점은 A를 9,000원쯤에 납품받았을 것이다. 그래야 마진이 남는다. A가 공장에서 출고된 가격은 더 쌌을 것이다. 대략 8,000원쯤 했다고 치자.

A라는 상품의 가격은 여럿이다. 출고가(8,000원)-납품가(9,000원)-소매가(10,000원)가 있다. 만약 유통 단계가 더 복잡하다면, 단계별 가격도 더 많아진다.

가격결정권은 이 단계별 가격을 각각 누가 통제할 것이냐를 따지는 담론이다. 유통업과 제조업, 두 업종이 탄생한 이래 계속된 갈등이다. 좀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숙명의 갈등인 셈이다.


제조업체는 모든 단계의 가격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가전제품을 생각해보자.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제조도 하지만, 판매도 한다. 자사 제품만 파는 유통 대리점을 전국에 두고 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현대차와 기아차 역시 제조도 하지만, 판매도 자신들이 도맡아 한다.

공장에서부터 소비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격을 좌지우지 하고 싶어하는 건 제조업체의 보편적 욕망이다. 그래야 장사하기가 편해지니까.

국내 식품업체도 과거엔 그랬다. 동네 슈퍼가 대부분이었던 시절, 가격은 전적으로 제조업체의 영토였다. 새우깡 봉지의 '권장소비자가격'을 제조공장에서 인쇄했던 시절이다.

가전과 자동차는 아직 공고하지만, 식품 시장은 상전벽해됐다. 대형마트에 한 번, 전자상거래에 또 한 번, 크게 출렁였다. 이마트와 쿠팡 없는 식품 시장은 이제 상상하기 어렵다.

유통 공룡들이 가격에 호락호락할까. 그럴리 없다. 반대로 가격 책정은 자신들 몫이라고 본다.

유통업체는 최종 소매가를 마음대로 정하려고 한다. 그래야 소비자 수요에 즉각 반응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그러려면 납품받는 가격도 자신들이 통제해야 한다.

10,000원짜리인 A 상품을 8,500원에 팔려는데, 제조업체에서 9,000원에 납품받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신라면 전쟁과 햇반 전쟁은 이 '가격 영토'를 서로 넓히려는 싸움이다. 신라면 전쟁은 식품업체의 판정승으로 끝났지만, 햇반 전쟁의 승패는 아직 알 수 없다.

가격결정권이 유통 쪽에 완전히 넘어간 식품도 있다. 아이스크림이 대표적이다. 같은 제품인데, 가격이 천차만별인 경험 많을 것이다. 유통업체마다 알아서 가격을 정하기 때문이다.

■ 소비자에게 유리한 결과는?

가격결정권이란 숙명의 권력을 위한 싸움이기에 이 전쟁은 쉽게 끝날 수 없다.

신라면 전쟁이 1차전, 햇반 전쟁이 2차전이라고 쳐도 앞으로 3차전, 4차전도 이어질 가능성 농후하다. 지금은 어느 한쪽이 압도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소비자 입장에선 누가 이겨야 할까.

최상은 박빙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래야 식품업체건 유통업체건 일방적으로 가격을 정할 수 없게 된다.

어느 한쪽이 가격을 일단 마음대로 통제하게 되면, 그 이후 수순은 뻔하다.

멀리 갈 것 없이, 애플을 생각해보자. 판매가를 마음대로 정한다. 어느 유통 채널도 가격을 임의로 깎지 못한다. 소비자가 따질 방법도 없다. 애플이 그렇다면 그냥 그런 것이다.

유통과 식품, 양자의 세력 균형에 필수적인 건 유능한 심판이다. 누구도 '시장 지배적 사업자'가 되지 못하도록 정부가 적절히 견제하는 게 중요하다. 공정거래위원회가 할 일이 많다.

조카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호랑이와 사자의 싸움? 동물원 관객 입장에서는 백중지세가 최고다.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는 싸움이 가장 흥미진진하다.

그래픽 : 배동희, 김홍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