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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명성황후 시해에 일본 총리 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각료들이 개입했음을 뒷받침하는 사료가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서 발굴됐습니다. 오는 8일과 9일 이틀간 KBS 1TV '광복 60년 특별기획'프로그램을 통해 최초로 공개되는 이 사료는 요시카와(芳川顯正) 사법상(司法相·법무장관)의 1895년 6월 20일자 편지입니다. 오늘의 인터넷독점에서는 이 편지가 가지는 의미와 함께 오는 8일로 110주년을 맞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해 정리해보겠습니다. ■110년만의 추적, 명성황후 시해사건 (10월 1일자, KBS 보도자료 전문) 이 프로그램은 동아시아 격동 20세기(13부작)을 지난 2000년부터 제작해 오고 있는 정수웅 감독이 근현대사에 있어서 한일 간의 원점인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다루지 않고서는 이 시대를 뛰어넘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지난 1년 동안 나 홀로 촬영 연출 시스템으로 한일해협을 수십 차례 왕래하면서 추적한 작품입니다. 지난 5월 12일 전후 한국의 주요 신문과 방송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 자객들의 후손이 110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여 사죄하는 모습을 대대적으로 보도,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 일은 최근 독도와 역사교과서 문제 등으로 한일 간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어서 더욱 관심을 집중시키었습니다. 2005년은,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지 40주년, 그리고 한국이 일본 식민지시대로부터 벗어난 지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더욱 거슬러 올라가 일본과의 치욕적인 을사늑약을 맺은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한국과 일본 간에 일어난 동아시아의 평화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던 사건들입니다. 과연 근현대사에 있어서 그 갈등의 원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사진 설명- 르 투르 뒤 몽드에 실린 사진]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을 때, 그 이유로 15개 항목을 열거했는데, 그 중 첫 번째가 조선의 국모를 살해한 죄라고 강조했습니다. 1895년 10월 8일 미명에 경복궁에 일어난 소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때부터 항일의병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노일전쟁이 발발, 결국 한일합방이 강제로 맺어지는 등 한일 관계는 마치 뒤엉킨 실타래처럼 꼬여가기 시작, 그 앙금은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올해로 110주년을 맞는 이 사건은, 최근 몇 년 사이에 역사 다큐멘터리나 연속 드라마 등으로 만들거나 뮤지컬로 만들어져 크게 관심을 끈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작품에서도 일본인 자객들 48명에 대해서 깊이 있게 다룬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교과서에 나오는 데로 일본인 낭인들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두려워해 우국충정으로 일으킨 사건이라고만 알고 있을 따름입니다. - 48명의 자객들. 그들은 과연 낭인들이었을까? - 그들 중 과반수에 가까운 21명이 구마모토 출신들인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 그들은 그 후 어떤 생을 살아갔을까? - 이 사건에 관해 일본 교과서에는 전혀 기술되어 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 그들 후손들 집에 명성황후와 관련된 기록이나 물건, 또는 사진들은 없을까? - 과연 처음으로 지시한 자는 누구일까? 이토 히로부미일까, 이노우에 가오루일까, 아니면 미우라 고로의 단독 범행일까? 이러한 의문들은 지난 110년간 그 어떤 매체로도 다루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한류 열풍이 한창이던 지난 늦가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최대 관련지이며 일본에서 가장 보수적인 지역이기도 한 구마모토(가토 기요마사의 터전), 그곳 교육회관에서는 양심적인 퇴직 교사들 10여명 모여 「민비사건을 생각하는 회」를 결성했습니다. 이들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하게 하여 21세기 한일 간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도록 해야 한다는 뜻에서 한일 근대사의 원점인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진상, 즉 자객들의 후손들을 찾아내고 기록들을 조사하여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을 찾아내기로 모임을 결성했습니다. 이들 퇴직 교사들을 앞세워 지난 6개월 동안 취재를 시도,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이 두 집안에서 나왔는가 하면 당시의 기록물들이 속속 발굴되었습니다. 또한 후쿠오카의 셋신잉(節信院)이란 사찰에서는 자객 중 한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 만들었다는 명성황후의 석상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이들 자객들 중 사건 당시 명성황후를 직접 살해한 것으로 알려진 두 사람, 즉 구니모토 시게아키와 이에이리 가키찌의 자손 두 사람을 한국에 동행케 하여 명성황후 홍릉과 사건 발생지 경복궁 및 명성황후 생가를 참관, 사죄케 하여 크게 화제를 일으켰습니다. [사진 설명- 로제티의 저서에 실린 사진]
이 프로그램은 단순히 자객들을 찾아가는 형식에 머물지 않고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 즉, 어떻게 해서 명성황후를 시해하기에 이르렀고 시해 장소가 실내인가 정원인가, 시해 배경에는 일본 천황이나 정부가 개입 되어 있는가, 현재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명성황후의 사진은 진짜인가, 시해사건 후 그들은 반년도 안 되어 모두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는가, 당시 일본으로 망명한 한국인 우범선과 황철은 어떤 삶을 살가 갔는가, 그리고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던 러시아인 사마틴과 미국인 다이 등은 과연 어떤 기록들을 남겼는가 등등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를 추적하고 아울러 대한제국이 건국되고 얼마 안가서 일본에 합방되었는지 을사늑약 100주년의 의미도 다루고자 합니다. 또한 이 프로그램은 한일 간의 비극적인 역사만을 다루어 지금까지처럼 천편일률적인 흑백 논리로 다루고자는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양심적인 일본인의 눈을 통해서 잘못되고 숨겨진 역사, 그 원점을 다시 되돌아보고 110년 만에 자객들 자손들의 사죄를 통해서 그것을 뛰어넘어 새로운 한일 간의 밝은 21세기를 열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아울러 역사적이 진실의 문제, 과연 명성황후는 누가 지시를 내린 것일까? 일본 국회도서관내의 헌정사료원을 검색한 결과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주한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지시를 내린 것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아직까지도 학계에서는 밝혀내지 못 한 사실입니다.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서 그 내막을 자세하게 발굴해 내는 목적 또한 갖습니다. ■ 명성황후는 누구인가? [사진 설명- 명성황후 시해범의 후손들이 사건 110년 만에 조상의 만행을 사죄] 명성황후는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황후로 본관은 여흥이며, 증영의정 민치록의 외동딸 입니다. 고종은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나 국정을 치르기엔 나이가 어려서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게 되고 정치 실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1866년(고종 3년) 16세에 왕비로 간택되었는데 이때 고종은 15세였습니다. 1882년 (고종 17년)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청의 힘을 빌어 대원군을 밀어내고 민씨정권을 수립하였으나 1894년 대원군이 재등장하면서 갑오경장이 시작되어 친일파가 정권을 잡게 되자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세력의 추방을 기도하였습니다. [사진 설명- 이승만 저서에 실린 사진]
이듬해인 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가 부임했으나 계속 이들을 견제하며 친러정책을 강화하자 일본인 낭인들이 8월 20일 궁궐을 침범하였고, 그 가운데 아다찌가 거느린 선봉부대의 흉인들에게 건청궁에서 난자당해 죽은 후 운반되어 소각되었습니다. 죽은 뒤 폐위되어 서인이 되었다가 10월 복호되고 1897년 (광무 1년) 명성이란 시호가 내려졌으며,이 해 11월 국장이 거행되었습니다. 능은 양주의 홍릉입니다. 명성황후는 1874년 (고종 11년)에 왕자를 낳아 2년 후에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그가 바로 순종입니다. ■ 을미사변 1895년 (고종 32)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동이 되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정변입니다. 갑오개혁을 통하여 깊숙이 조선 내정에 간여하게 된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 박영효(朴泳孝)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만들어 세력확장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때 프랑스 러시아 독일 등 3국은 일본의 대륙침략 저지를 위해,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차지한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청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한,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세력확장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그동안 일본의 강압하에 내정개혁을 추진한 조선정부는, 러시아공사 K.베베르와 제휴하고 친일세력의 완전 제거를 위하여, 1895년 9월 6일 왕비시해 음모혐의로 전 내무대신 박영효에 대해 체포령을 내려 정계에서 축출하였습니다. 이미 8월에 민영환(閔泳煥)을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로 등용한 동시에, 친일계인 어윤중(魚允中) 김가진(金嘉鎭) 등을 면직시키고 이범진(李範晋) 이완용(李完用) 등의 친러파를 기용하여,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어, 친미친러세력이 우세하였습니다. 더구나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조선정부에 약속한 증여금 300만 원을 일본정부가 제공하지 않자, 조선정계에서는 배일세력이 증가하였습니다. 이에 일본측은 이노우에 대신 무인 출신 미우라를 주한일본공사로 파견하였습니다. 조선정부는 일본의 강압에 따라 제정한 신제도를 구제도로 복구하려고, 일본인 교관이 훈련시킨 2개 대대의 훈련대도 해산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미우라는 명성황후 시해계획을 세우고, 1895년 10월 2일 하수인으로서 한성신보사(韓城新報社)에 있는 낭인(浪人)을 이용하고자 사장 아다치[安達]를 공사관으로 불러 6,000원의 거사자금을 주고 왕비시해의 전위대로 삼아, 공덕리(孔德里) 아소정(我笑亭)에 있는 흥선대원군을 궁중으로 호위하는 일을 담당시켰습니다. 그 외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인 거류지 담당경찰관 및 친일조선인까지 동원할 계획을 세우고, 훈련대의 우범선(禹範善)·이두황(李斗璜)·이진호(李軫鎬) 등 3대대장과 전 군부협판(軍部協辦) 이주회(李周會)를 포섭하였습니다. 한편 정부에서는 군부대신 안경수(安멎壽)를 일본 공사관에 보내어 훈련대 해산과 무장해제, 민영준(閔泳駿)의 궁내부대신 임명을 통고하였습니다. 일본은 상황이 급변함을 직감하고 명성황후 시해계획을 10월 8일 새벽으로 결행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일본인 자객들은, 서대문을 거쳐 우범선·이두황이 지휘한 조선 훈련대와 합류하여 광화문을 통과하였습니다.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과 군부대신 안경수가 1개 중대의 시위대 병력으로, 이들의 대궐 침범을 제지하려다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흉도(兇徒)들은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과 홍계훈을 살해한 다음, 이어서 왕비의 침실인 옥호루(玉壺樓)에 난입하여 왕비를 살해하고,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뒤 뒷산에 묻었습니다. 곧 새로 유길준(兪吉濬)·서광범(徐光範)·정병하(鄭秉夏)·김종한·권형진(權瀅鎭) 등 친일파를 중심으로, 제4차 김홍집내각을 수립하였습니다. 명성황후시해 현장에는 고종·황태자 및 미국인 교관 다이,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 그외 많은 조선인이 있어 진상을 낱낱이 목격하여 사건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자세히 알려졌습니다. 이에 구미열강이 강경한 태도로 일본인의 사건 관여사실을 주장하고 나서자, 일본은 이의 처리방안으로서 미우라를 해임, 고무라[小村]를 판리공사(辦理公使)로 임명하였습니다. 한편 미우라 등 관계자 48명을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구치하고, 형식적으로 관련혐의자에 대한 취조를 하였으며, 결국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전원석방시켰습니다. 결국 을미사변은 항일의병활동의 원인과 아관파천(俄館播遷)의 계기가 되어, 한국은 러시아의 보호국과 같은 지위로 떨어졌고, 일본의 식민지화계획에 차질을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