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때 거절하지 못했나”…이유 있는 여군의 침묵_브라질 월드컵 베팅_krv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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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의도 없었는데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미안하다. 모든 상처를 털어버리고 다시 자신감 있고 당당한 너의 모습으로 돌아오렴."

여군 A 소위는 장문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발신자는 얼마 전까지 자신의 상급자였던 B 소령이었습니다. A 소위는 답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의도는 없었다'는 말이 '네가 너무 예민한 것 아니냐'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신고할 거냐? 신고하지 마"… 상급자의 불편한 농담

사건은 지난해 8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인천의 한 해군부대에 전입한 A 소위. 얼마 지나지 않아 부서장인 B 소령의 부적절한 농담과 연락이 시작됐습니다.

B 소령은 특히 A 소위의 사생활이나 이성 관계를 궁금해했습니다. 과거에 사귀었던 남자는 어땠는지, 또래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남자가 몇 살인지, 주말엔 뭐 하는지 등 부대 상급자와 하급자 사이에 불필요한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A 소위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기 쉽지 않았습니다. 부대에 갓 전입한 소위에게 부서장인 B 소령은 너무나 지위가 높았기 때문입니다.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당했을 때 거절 의사를 명확히 표시하라고 교육받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B 소령이 술을 마실 때면, 보고 싶다는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그리고 데리러 오라고 요구했습니다. A 소위는 끝까지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마지 못해 나간 술자리에선 음담패설도 들어야 했습니다. B 소령은 "신고할 거냐? 신고하지 마!"라고 말한 뒤 자신의 동기가 겪었던 잠자리 이야기를 했습니다.

"처음에 솔직히 한 일주일 동안은 이상하다고만 생각만 했고요. 2주차부터는 이건 좀 아니다 생각했고, 3주차부터는 '이건 확실히 성희롱이다' 생각을 했고, 4주차가 됐을 때 신고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A 소위-


'성폭력' 신고했지만…쏟아지는 2차 피해

A 소위는 성고충상담관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고, 조사가 곧바로 시작됐습니다.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부대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주변의 관심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쏟아졌습니다.

"왜 그때 거절하지 않았어? 그때 싫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잖아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했던 행동들이 누군가에게는 조롱거리가 되고, 가해자의 행동이 합리화되는 걸 보면서 A 소위는 괴로움을 느껴야 했습니다.

2차 피해가 심해지자 A 소위는 어느 순간 가해자인 B 소령의 행동을 이해해보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하지 않았을 거야. 그분 그렇게 생각하실 사람 아니야. 약간 이렇게 고쳐먹지 않으면 도저히 지옥 같은 일상에서 버티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순간 그렇게 생각이 되기 시작하더라고요" -A 소위-

A 소위는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것도 힘들었고,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결국, 우울증 증세도 심해지면서 지금도 병원까지 다니고 있습니다.

조사 끝에 정직 2개월 처분을 받은 B 소령은 현재 재심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취재진은 B 소령의 입장을 듣기 위해 수차례 연락했지만 닿지 않았습니다.

"피해자의 2/3가 5년 미만 여성 초급간부"… 왜?

A 소위의 사례에서 보듯 군대 내 성폭력은 대부분 계급과 지위를 이용한 권력관계에서 일어납니다.

군에서 상급자와 하급자 사이에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특히 성폭력 피해 여군들은 목소리를 내기 어렵습니다. 상급자에겐 '인사권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장기 복무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 대상자에게 인사권자의 권력은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폭력 사건 보고는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고, 이것이 장기복무 심사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두려움은 피해자가 쉽게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만듭니다.

실제 지난해 각 군 양성평등센터에 접수된 군대 성폭력 피해자 66명 가운데 44명이 5년 미만의 여성 초급 간부였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중·소위가 17명(26%), 중·하사가 27명(41%)입니다.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 우리 군 당국의 인식과 자세는 위계적인 군 문화와 질서 탓에 여전히 폐쇄적이고 안일하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이러다 보니 군 내부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해 고발과 수사가 진행되더라도 피해자가 2차 피해를 겪는 일이 빈번한 실정입니다.

군대 성폭력을 줄이기 위해선 피해자가 두려움 없이 신고할 수 있는 분위기와 제도, 군대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보호해준다는 믿음을 주는 게 중요하다는 지적입니다. 물론 상급자의 성폭력을 '위력에 의한 성범죄'로 엄벌해 또 다른 피해자들이 용기를 낼 수 있도록 하는 일도 병행돼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