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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완 대통령 비서실장은 우리가 선진국을 자임할 수 없는 데엔 지성과 언론의 위기가 자리하고 있다며, 우리 사회의 지성이 막강한 '정치언론'에 휘둘리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병완 비서실장은 오늘, 청와대 직원들에게 드리는 글에서 이같이 말하고,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올해의 상징적 사건으로 *뉴라이트의 '한국 근현대사 대안교과서' 시안발표와 *전효숙 헌재소장 임명동의안 처리과정의 문제, *한나라당 사무총장의 여기자 성추행사건을 들고, 이들 사건 중심엔 언론이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병완 실장은 뉴라이트의 대안교과서가 사실상 일제를 찬양하고 있음에도 우리 지성계가 우익 신문들의 덫에 갇힌 탓인지 침묵하고 있다며 무서운 현상이며 파쇼적 분위기라고 말했습니다. 이 실장은 전효숙 헌재소장 임명동의안 철회는 사실상 우리 의회 민주주의의 조종이나 다름없다며, '여성', '호남', '비주류', '진보', '코드' 등 전 재판관에게 덧씌워진 허위의 거품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극우의 광기를 본다고 말했습니다. 이 실장은 또, 여기자 성추행 사건에 대해 차기 집권을 노리는 유력 당의 간부 대부분과 신문사 간부진, 기자들이 밥먹고, 폭탄주 돌리고, 노래방까지 갔다면 이는 단순한 회합이 아니며, 정언유착의 일단이 드러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실장은 우리 사회 '정치언론'은 민주주의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이를 뚫어보는 혜안을 갖고 있고 10년전, 5년전 처럼 필요한 시점에서 발휘했다며, 역사는 본질상 진보의 흐름이고 혼돈스런 때일수록 방향감각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대통령비서실 직원 여러분께 2006년 한 해를 보내며 드리는 글’ 전문

친애하는 비서실 가족 여러분. 오랜만입니다. 어느덧 올해도 긴 그림자를 남기며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녹지원 뒤편, 팔다리를 훤히 드러낸 나무들과 수북이 쌓인 낙엽들이 더욱 계절의 미감을 자아냅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비구니 스님의 詩한자락이 들춰집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통-그리움’ 한 페이지에 딱 이 한 줄만 쓰여진 詩이지만 한참동안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질 못했습니다. ‘그리움’을 ‘기다림’으로 바꿀 수는 없을까하는 맥놀이 같은 상념 때문입니다. 이 시점, 이 시간도 그렇게 넘기기엔 많은 생각과 미련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지난 한해를 생각해 봅니다. 항용 그래 왔듯이 정말 다사다난 했습니다. 여전히 많은 일과 사건들이 시간을 타고 흘러가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양극화논쟁, 5.31지방선거, 부동산 문제, 바다이야기, 한미FTA 갈등, 평택 미군기지 이전 관련사건, 전시 작전통제권환수문제, 북한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등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건과 이슈의 연속이었습니다. 불가피한 논쟁과 갈등을 가져오고, 예기치 않은 대립과 충돌로도 이어졌지만 하나 둘 해답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시간의 위력인가 봅니다. 우리는 과연 선진국임을 자신할 수 있는가 함께 기뻐하고 감격했던 일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국산 초음속훈련기 T-50의 생산, 메이저리그를 압도한 한국 야구의 WBC 4강과 김연아 선수의 세계피겨스케이팅 우승, 반기문 외교통상부장관의 유엔 사무총장 당선, 그리고 수출 3천억달러 돌파는 우리의 자긍심을 고취한 소중한 기억들입니다. 특히 이들은 따져볼수록 대한민국이 이젠 선진국 반열에 진입했다는 징표로 볼만한 성격들을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질 수 있는 결과들이 아니라 우리나라 각 분야 역량의 종합된 바탕 위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과실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젓게 됩니다. 우리는 과연 선진 반열에 들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지표로만 풀 수 없는 선진국의 조건을 따져 봅니다. 정량평가가 아닌 정성평가로 우리 사회를 진단할 때, 왜 우리는 선진국을 자임할 수 없는지 생각해봅니다. 저는 그 대답의 하나를 감히 대한민국 知性과 언론의 위기에서 찾고자 합니다. 그리고 2006년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하고 상징적인 세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복권된 일제 식민통치와 독재의 역사 단연 첫 번째 사건은 우리사회의 신우익(뉴라이트)의 두뇌들이라는 몇몇 학자들의 모임인 교과서포럼이 내놓은 이른바 「한국 근현대 대안 교과서」시안 발표입니다. 아시다시피 「교과서 포럼」은 일제식민지시대를 ‘近代로의 주체적 이행 과정’이고, ‘이 땅에 시장경제와 사회간접자본이 도입 구축되고 도시화·산업화 등이 이뤄진 근대적 경제 성장기’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극우 지식집단인 「새역모(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가 주장, 강변하고 있는 식민사관의 한국적 변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새역모」는 △일제의 조선합병은 동아시아를 안정시키고△식민지배가 조선 근대화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런 논리는 식민시절 일제가 이른바「文化통치」로 식민지배 전략을 바꾸면서 조선인들에게 신문을 발행하게 하고, 학교를 보급하면서 줄곧 이 땅의 지식인들을 일본화시키던 궤변들입니다. 「교과서」 포럼은 또한 4.19혁명을 4.19학생운동으로, 유신독재를 국가적 과제달성을 제고시킨 체제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5.18민주화운동의 원인 역시 ‘중앙권력에서 소외된 광주지역의 분노’에 맞추고 있습니다. 과연 이 「교과서 포럼」 사건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단순히 정신 나간 학자들의 해프닝일까요. 이 사건은 특정세력이 꿈꾸는 우리 역사에 대한 逆謀사건입니다. 매일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지면 구성을 감안하면 대다수 언론은 이번 사건을 일과성으로 치부해 버렸습니다. 정치권도 몇 마디 비판 논평을 끝으로 외면하고 있습니다. 기껏 4.19와 5.16문제만을 정파적 견지에서 시시비비식으로 다루었습니다. 우리의 지성계마저 우물우물 넘어갔습니다. 언론과 지성의 침묵 혹은 방관, 무죄인가 왜 그랬을까요. 보수 우익신문들이 조용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들이 지원하고, 키워오고, 다음 정권의 담임세력으로 밀어온 이른바 뉴라이트 세력이 만든 역사기술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과거사를 가리고, 정당화시키는 이론을 제공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다고 치고, 대다수 우리 지성계가 이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몇몇 보수 우익신문들의 덫에 갇혀 있기 때문 아닌가요. 이들과의 피곤한 싸움을 피하려는 것 아닐까요. 무서운 현실이고, 두려운 현상입니다. 파쇼적 분위기가 넘실거립니다. 보수를 가장한 극우 세력의 정파적 책략에 의해 우리 역사가 일본의 주변부 역사로 뒤집혀지고, 한민족의 혼과 맥을 끊으려 했던 강점과 침탈의 일제시대가 사실상 찬양되고, 피로 얼룩진 민주화 역사가 짓밟히는데도 대다수 지성과 대다수 언론이 침묵내지 방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일부 신문의 전매특허인 사상검증은 어디로 갔습니까. 「교과서 포럼」의 뉴라이트 세력은 불령선인(不逞鮮人)이 아니라서 면죄부를 주자는 것입니까. 최소한의 이성과 지성이 있다면 ‘교과서 포럼의 그 더러운 펜을 꺾어라’고 질타해야 할 일 아닙니까. 그런데 이 문제에 우리는 왜 그토록 점잖아야 합니까. 여성, 호남, 비주류에 대한 뿌리깊은 비토 두 번째 사건은 전효숙 헌재소장 임명동의안 문제의 처리과정입니다. 전효숙 헌재소장 임명동의안의 철회는 사실 우리 의회민주주의의 조종(弔鐘)이나 다름 없습니다. 한나라당은 반대와 찬성마저 거부한 채 단상 점거를 통한 물리력으로 의회민주주의의 요체인 표결절차마저 봉쇄했습니다. 최소한의 민주주의 절차도 뭉개버린 한나라당의 ‘안하무인’, ‘기고만장’만을 탓할 수 없습니다. 과정이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의정절차를 진행시키지 못한 국회 역시 책임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또 이 모든 것에 끝내는 굴복하고만 참여정부는 스스로 민주주의의 조종(弔鐘)을 친 종지기가 된 셈입니다. 부끄럽습니다. 굳이 덧붙인다면, 시급하고 중요한 입법안과 예산안의 통과라는 국정의 고육지책이라고 변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이 명백한 불합리와 부조리에 대한 언론과 지성의 침묵과 외면입니다. 한 때는 국민모두에게 생소한 관습헌법의 논리까지 끄집어 내 법리적 쟁투를 벌였던 법조계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언론과 지성들마저 이 사안의 본질을 외면한 채 동네 불싸움 보듯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김한길 열린우리당 원내대표가 국회연설에서 ‘전효숙은 무죄입니다.’라고 한 마디를 던졌지만 그 함의는 수수께끼로 묻혔습니다. 우리는 이제 확실하고 정확하게 말해야 합니다. 에밀졸라가 ‘거듭 말하지만 드레퓌스는 무죄입니다’라고 외쳤듯이 ‘거듭 말하지만 전효숙은 무죄입니다.’라고 외쳐야 합니다. ‘나의 임무는 말하는 것이지 공범자가 되자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말했던 에밀졸라에게 우리 모두는 결국 공범자가 되었습니다. 전효숙 전 재판관에게 덧씌운 허위의 거품들을 보면서 우리 사회에도 1900년대초 프랑스를 휩쓸던 反셈족주의와 같은 극우의 광기가 흐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 ‘호남’, ‘비주류’, ‘진보’, ‘코드’.... 내장된 색깔론을 애써 감추면서 그들은 적반하장식으로 헌정수호라고 호도했습니다. 유신, 5공을 거치며 헌정과 헌법은 그들의 사유물이 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극우세력과 극우언론, 그들의 비호와 지원을 받는 정치세력에게 지성마저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요. ‘이 사실을 크게 외친다면 모든 세상 사람들이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5년, 적어도 50년 안에 모든 사람들이 이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드레퓌스 사건에 충격을 받고 유대인, 아랍인, 크리스천이 함께 어울리는 꿈의 팔레스타인 건설을 추구했던 헤르즐의 독백처럼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될 날은 그리 멀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만취한 술자리의 부적절한 정언유착 이제 마지막으로 세 번째 사건은 이른바 한나라당 사무총장의 여기자 성추행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법정에서 법리논쟁으로 가릴 단순한 형사 문제로 보아야 할까요. 이 사건은 우리 민주주의의 후진성과 아직도 잔존하는 일부 언론계의 깊은 내상을 드러낸 상징적 사건입니다. 우리 정치에서 외형상 ‘차떼기’, ‘사과상자’로 대표됐던 정경유착은 이제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적어도 돈 안 쓰는 선거의 기본은 잡혔습니다. 참여정부 들어 ‘권언유착’도 구시대의 유물로 넘어갔습니다. 과거 권언유착은 집권세력과 일부 언론사나 언론인 간의 주고받기식 구조를 말해 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1야당 사무총장의 여기자 성추행사건은 일부언론과 정치세력간의 새로운 구조적 문제를 보여줍니다.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뉴스원과 기자, 언론인 간의 회합과 교감은 언론의 임무를 서로가 유지 발전시키는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밥 먹고, 술 마시고, 노래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적어도 취재와 소통을 위한 개별적인 만남과 유대 관계의 차원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차기 집권을 노리는 유력 黨 간부 대부분과 신문사의 간부진과 기자들이 한 데 모여 밥 먹고, 폭탄주 돌리고, 2차로 노래방까지 함께 갔다면 이를 단순한 정·언 간 회합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일반회사나 단체에선 이런 경우 흔히 단합대회의 뒷풀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벌건 대낮에 벌어졌던 권언유착구조가 사라진 뒤 어두운 야밤에 생겨난 정언유착관계의 일단이 성추행 사건으로 드러났을 뿐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유착은 짝사랑으로 이뤄질 수 없습니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상호간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조적 문제를 외면한 채 만취로 기억이 없다는 사무총장의 손바닥만을 손가락질 했습니다. 대다수 언론과 지성인들의 비판마저도 국회의원의 손바닥만을 나무랐습니다. 사건 자체가 또 다른 술좌석의 안주거리로 전락했습니다. 과연 만취한 정치인이 욕보인 실체는 무엇이고, 이 사건의 진정한 피해자는 누구입니까. 술취한 언론입니까. 애꿎은 여기자입니까. 아니면 모욕당한 독자들입니까. 우리의 지성, 과연 정치언론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저는 앞서 제기한 세가지 사건을 2006년에 일어난 그 어떤 사건보다도 이 시대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사건의 중심엔 항상 ‘언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스스로 민주주의의 파수꾼이자 감시견으로서의 소임과 역할을 포기하고 외면하는 ‘정치언론’과 ‘언론정치’입니다. 꽤 얼마 전 일단의 학자들이 지성의 근원학문이라 할 文·史·哲이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우리사회의 지성이 상당 부분 막강한 ‘정치언론’에 휘둘리고 있고, ‘언론정치’에 의해 유실돼 가고 있다는 증거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탁류처럼 흐르고 있는 정치언론과 언론정치로부터 지성의 정체성을 유지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은 ‘정치언론’과 ‘언론정치’의 짙은 안개를 뚫어 보는 혜안과 지혜를 잃지 않고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국민들은 그것을 필요한 시점, 필요한 공간에서 발휘할 뿐입니다. 그랬기에 대한민국이,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10년전에도 그랬고, 5년전에도 그랬습니다. 정치언론과 언론정치는 속성상 그들이 속한 환경에 탐닉하고, 스스로 만든 상황만을 전할 뿐입니다. 정치언론과 언론정치의 피할 수 없는 한계이고, 그들이 보여준 십 수년의 학습효과입니다. 역사는 본질상 진보의 흐름...방향감각 잃지 말아야 그럼에도 때로는 혼돈스럽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방향감각이 중요합니다. 방향감각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지향하는 가치에 대한 정체성의 유지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름에 걸맞는 역사는 그 자체 안에서 방향감각을 찾아내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만이 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딘가로부터 왔다는 믿음은 우리가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믿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진보로서의 역사」를 주장한 E.H 카의 말처럼 우리가 가고 있는 역사는 본질상 진보의 흐름이라고 믿습니다. 이 흐름을 일시적으로 기득권과 반동의 저수지에 가둘 수는 있어도 곧 둑이 터지고 마는 것은 역시 시간의 조화라고 봅니다. 2006년에 묻혀져 가고 있는 ‘교과서 포럼’, ‘전효숙’, ‘여기자 성추행’ 이 세 가지 이름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이유입니다. 비서실 가족 여러분. 올해 남은 과제들을 힘껏 정리합시다. 새해를 기다리는 시간을 즐겁게 보냅시다. ‘새해가 겨울의 한 복판에 자리잡은 까닭은 낡은 것들이 겨울을 건너지 못하기 때문인가 봅니다. 낡은 것으로부터의 결별이 새로움의 한 조건이고 보면 칼날같은 추위가 낡은 것들을 가차없이 잘라 버리는 겨울의 한 복판에 정월 초하루가 자리잡고 있는 까닭을 알겠습니다.’ ‘나무의 나이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겨울에 자란 부분일수록 여름에 자란 부분보다 훨씬 단단하다는 사실입니다.’ 신영복 선생의 옥중서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겨울에 관한 글을 뽑아 비서실 가족들과 함께 읽고자 합니다. 지난 4년 그랬듯이 멀리보고 뚜벅뚜벅 갑시다. 새해의 희망이 보입니다. 새로운 희망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06. 12.11 이 병 완 드림 [출처: 청와대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