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외국어 교육, 지금 못지 않게 훌륭”_손실과 이득 사이_krv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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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 교육 전문기관, 조기교육, 집중적 반복교육, 생생한 회화교육, 교재의 끊임없는 수정·보완….

이렇게만 봐서는 21세기 한국에서 이뤄지는 외국어 교육 방식이라고 해도 거의 다른 점이 없을 듯싶다. 외국어 교육의 좋은 점만 가져다 놓은 듯한 이같은 방식은 사실 조선시대 내내 국가 차원에서 운용한 것이었다.

학계에서 관심을 두는 이가 별로 없던 조선시대 외국어 교육제도의 진면목을 발견한 사람은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언어학자 정광 고려대 명예교수다. 그는 '노걸대'(老乞大), '몽고자운'(夢古字韻) 등 동아시아의 오래된 외국어 교재를 찾아내고 연구해 국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정 교수는 30여년간 자신이 연구한 성과를 정리해 최근 펴낸 책 '조선시대의 외국어 교육'(김영사)에서 "조선시대의 외국어 교육은 오늘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없을 만큼 훌륭했다"고 자신있게 평가한다.

책에 따르면 한반도에서는 원(元)나라 이후 한어(漢語)라는 새로운 중국어가 생겨나고서부터 외국어 교육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중국 대륙을 정복한 몽골은 지금의 베이징(北京) 지역인 연경(燕京)을 도읍으로 정하고 이 지역 언어를 공용어로 삼았다. 당시 연경에는 중국인과 여러 소수민족이 어울려 살았던 탓에 일종의 '엉터리 중국어'랄 수 있는 한어가 통용됐다.

기존 중국어와 매우 달랐던 한어는 사서오경의 한문으로는 배울 수 없어 별도 교육이 필요했다. 게다가 한반도와 인접해 접촉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몽골, 여진, 만주어는 물론 바다 건너 일본의 언어도 배워야 했다.

이렇듯 국가적으로 중요한 외국어 교육을 담당하고 역관(譯官)을 양성·관리한 기관이 바로 사역원(司譯院)이다. 고려 충렬왕 2년(1276년) 설치된 통문관(通文館)이 시초이니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역원이 폐지되기까지 무려 6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셈이다.

국립 외국어 교육기관으로서 사역원의 우수성은 5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먼저 요즘도 외국어 교육에서 많이 거론되는 '조기교육'을 들 수 있다. 5세 때 이미 사역원의 왜학(倭學), 요즘 말로 하면 일본어과에 생도로 들어가 공부를 시작한 현계근(玄啓根)이라는 인물이 대표적인 예다.

사역원 역관들은 역과(譯科)에 급제해 관직에 있더라도 끊임없이 어학 교재를 외우고 시험을 봐야 했다. 관직에 있는 한 반복학습을 멈출 수 없었던 셈이다.

'문법책 외우기'보다 '실전'을 중요시한 교육 방향도 눈에 띈다. 당시 쓰인 '노걸대' '박통사'(朴通事) 등 회화 교재들은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서 주고받는 대화를 익히는 데 초점을 맞췄다.

교육은 언어의 역사적 변화를 수시로 반영했다. 외국에 보내는 사절단에는 언어 교재 수정을 담당할 인원이 반드시 포함됐다. 대다수 역학서들은 첫 간행 이후 '신석'(新釋), '개수'(改修), '중간'(重刊)이라는 이름으로 수정·증보됐다.

정 교수는 "세계사에서 조선조와 같이 외교 통역관을 양성하는 국가기관을 지속적으로 설치 운영한 예는 극히 드물다"며 "근대 이전에 사역원과 같은 관청을 설치해 이민족 언어의 통역을 전담하는 관리를 제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양성한 나라는 별로 많지 않다"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