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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동북부에 지진이 발생한 지 보름이 넘었습니다. 지진에 이어 원전 붕괴 위험. 한꺼번에 닥친 불행 앞에 이재민들은 속수무책으로 삶의 터전을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터뷰> 이도카와(후쿠시마현 후타바마치 초장) : "이곳을 떠나는 것이 실로 가슴이 찢어집니다만 (피해 지역을)복구하기 위해서는 한 곳으로 통합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므로 어제 그런 결단을 내렸어요." 집과 생업을 잃은 것도 견디기 어렵지만, 가족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 이재민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합니다. <인터뷰> 이재민(딸이 행방불명됨) : "(딸이 집으로)돌아와도 어쩔 수 없고,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겠죠." 언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전혀 알 수 없는, 막막한 생활은 보름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일본 대지진으로 숨진 사람이 만 명을 넘었습니다. 실종된 사람도 만 7천 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됐는데요. 집도 가족도 잃은 이재민들은 대피소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습니다. 수천 명이 모인 대피소 강당에서 잠을 청하고 주먹밥과 빵으로 끼니를 떼우며 팍팍한 생활을 하고있는 이재민들의 모습을 취재했습니다. 속수무책으로 재난을 당한 일본인들... 돌아갈 집이 부서지고, 사라져 이재민이 된 사람들은 급히 마련된 대피소에서 피난 생활을 해야만하는 상황입니다. 지진피해 지역에서부터 도쿄 인근, 도쿄 시내 곳곳까지 대피소 수천 개가 꾸려졌습니다. 25만 명에 가까운 이재민들은 대피소로 모여들였습니다. 재난이 가져다 준 상처는 대피소로 몸을 피한 뒤에도 감당하기가 힘듭니다. <인터뷰> 오하라 에리코(지진해일로 남편 사망) : "남편에게 (지진이)나자마자 전화가 왔어요. '목숨만 있으면 아무것도 없어도 되니까 쓰나미가 오면 도망쳐'라는 것이 마지막 말이었어요.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요." 살아서 만난 사람들도 눈물이 나기는 마찬가지. <인터뷰> 이재민(헤어졌던 가족과 상봉) : "괜찮아요. 금방 복구될거야." "건강한 모습을 보니 안심되는 한편, 후타바에서 만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어느 정도 포기하면서도 모두 힘내자고 격려하면서 1주일 동안 생활했어요." 안도와 막막함이 복잡하게 오가는 표정입니다. <인터뷰> 이재민 : "힘을 내고, 이 역경을 극복해서 모두 함께..." "웃으면서 술이라도 마시고 싶네요." 중학교 3학년인 슌은 졸업식 하루 전날 지진해일로 집을 잃었습니다.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대피소 일을 도우며 꿋꿋하게 지내고 있지만 아버지가 그립기만 합니다. <인터뷰> 다카하시 슌(아버지가 행방불명됨) : "15년 동안 제멋대로 굴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데려다 주시고 칭찬도 많이 해주셔서 (아버지를 찾으면)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슌처럼 아버지의 생사를 알 수 없어 애를 태웠던 와타나베 세이코씨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인터뷰> 와타나베 세이코 : "어디 있는지 연락이 되지 않았어요. 살아있어줘서 고맙죠." 대피소 한쪽에 마련된 게시판엔 헤어진 가족을 찾는 벽보가 빈틈없이 붙어있습니다. <인터뷰> 이재민(딸이 행방불명됨) : "딸을 찾으러 왔어요.(딸이 집으로)돌아와도 어쩔 수 없고,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겠죠." '무사하다면 돌아오렴' 딸의 생사라도 알고 싶은 어머니는 간절한 마음을 담은 벽보를 붙이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다른 쪽에는 이재민 대책본부가 마련한 생존자 명부가 붙어있습니다. 명부를 꼼꼼히 살펴보는 한 이재민. 아는 이름 몇몇을 확인하고 나서 표정이 한결 밝아졌습니다. <인터뷰> 이재민 : "(행방불명된)지인이나 직원 등이 많아 명부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방금 몇 명을 확인했어요. 하지만 보이지 않는 이름이 더 많네요" 지진해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가까스로 건진 짐을 가지고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이번에는 원전 붕괴 공포로 정든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원전이 있는 후쿠시마현의 주민들이 대거 피난길에 나섰습니다. <인터뷰> 사토 준코(이재민) : "(언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자칫했다가는 평생 돌어가지 못할 수도 있어요." 준코씨는 태어나 자란 곳을 도망치듯 떠나 돌아갈 날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인터뷰> 사토 준코(이재민) : "(후쿠시마에서 태어나고 자라셨나요?) 네. (고향이시네요.) 평생 돌아가지 못해도 좋으니까 한 번 만이라도 집에 돌아가 (추억이 담긴)비디오테이프 같은 것이라도 가져오고 싶어요." 간노 사다코 할머니 역시 후쿠시마 토박이입니다. 간노 할머니는 지진 해일로 친정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됐습니다. <인터뷰> 간노 사다코(이재민) : "친정은 완전히 전멸이에요. (친척들은 무사한가요?) 네, 하지만 집은 흔적도 없죠. (친척 중에 돌아가신 분도 계신가요?) 친척은 아니지만 딸의 친구가 아이와 함께 휩쓸렸어요. 힘든 일이네요." 다나카 가오리씨는 여섯 살 준과 두 살 하루. 두 아들을 데리고 피난을 왔습니다. 지진해일로 피해를 입은 후쿠시마의 집을 복구하기도 전에 방사능 위험때문에 서둘러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떠났습니다. <인터뷰> 다나카 가오리(이재민) : "아무래도 어린 아이들이 있어서 방사능의 영향이 무서워서 대피했어요." 자원봉사자들이 가져다주는 음식과 옷가지들로 하루하루를 견뎌가고 있지만 앞으로의 일이 막막합니다. <인터뷰> 다나카 가오리 : "다음 주부터 어쩌면 (회사에서) 일이 시작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 돌아가지 않으면 실직은 뻔하고 어떻게 해야할지..." "눈앞에 닥친 일인데도 아직 정하지 않았어요." 곧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생계를 이어갈 수 없지만 어린 아이들이 걱정입니다. <인터뷰> 다나카 가오리(이재민) : "(방사능이) 눈에 보이지 않기때문에 어디에서 어디까지 안전한지, 돌아가도 괜찮을지도 고민되고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해요" 도쿄 시내 곳곳에 마련된 소규모 대피소 중의 하납니다. 좁고 어두운 계단을 올라가면 나오는 방 한 칸. 고바야시 부부가 1주일째 머무는 곳입니다. 올해 일흔, 예순 넷의 고바야시 부부의 집은 후쿠시마현 이이다테 마을로 원전 사고가 난 체르노빌보다 더 심한 방사능 오염이 진행된 곳입니다. <인터뷰> 고바야시 다카시(이재민) : "(고향 땅이)방사능에 오염되어 최소 20년이나 걸린다고 하는데 방사능이 사라졌을 때는 (저는) 이 세상에 없겠죠." "어처구니 없죠. 그 정도 농도래요." 부인 사치코씨는 방사능을 쬐면 더 나빠진다는 갑상선 질환을 앓고 있어 더 걱정스러운 눈칩니다. <인터뷰> 고바야시 부부 : "저는 (지병으로) 당뇨병과 갑상선질환이 있어요." "갑상선이 가장 위험하잖아요. 방사선에 피폭되면요. 갑상선에 방사능 물질이 축적되서 병에 걸린다고 하니까요." 원전의 방사능 유출 위험 때문에 지진해일 피해지역의 복구는 아직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재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날은 기약이 없습니다. 삼각김밥과 빵으로 끼니를 대신하고 목욕조차 쉽지 않은 하루하루. 가족과 고향을 잃은 채, 언제 끝날 지 모르는 대피소 생활이 서로 격려하며 견디고 있는 이재민들을 조금씩 지치게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