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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성 씨는 1956년 광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부모의 얼굴도 모른 채 광주의 한 영아원에서 자랐습니다. 갓난아기 때부터 친구 '박용준'과 함께 자랐습니다. 박용준 열사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유일한 시민 언론이었던 '투사회보'를 제작하고 배포한 사람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두 청년은 생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서한성 씨는 구두닦이부터 영화관 과자 판매원까지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친구 박용준은 당시 광주 YWCA 신협에 취직했습니다.

박용준 열사(왼쪽)과 어린 시절 서한성씨(오른쪽 동그라미 안)의 모습.
생업에 몰두하던 두 청년의 삶을 바꿔놓은 건 5.18이었습니다. 박 열사는 5.18이 일어나기 2년 전부터 광주 최초의 노동야학인 '들불야학'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유일한 소식지였던 '투사회보'도 그곳을 중심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서한성 씨는 박 열사를 만나러 갔다가 투사회보 제작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1980년 5월 19일에 시민아파트, 광천동 시민아파트에서 용준이랑 나랑 그때 투사회보 등사판 긁는 거 같이 하고... 그래서 이걸 어떻게 뿌릴까 하다가 내가 버스 타고 다니면서 뿌리는 게 제일 좋겠다 해서 버스 타고 다니면서 뿌렸지. 그때는 안내양들이 차비 받을 때야. 뿌리고 나오면 안내양들이 차비도 안 받고 고생하고, 몸조심하라고 그러면서…."

5.18민주화운동 당시 배포됐던 투사회보. 박용준 열사가 직접 글씨를 쓰고, 서한성 씨가 시민에 배포했다.
그렇게 서한성 씨는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시민군과 계엄군이 도청에서 최후항전을 벌이던 날, 바로 옆 YWCA 건물에 올라 갔습니다. 친구 박용준 열사는 건물 본관에, 서한성 씨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안쪽 건물에 숨었습니다. 서한성 씨는 동료들에게 "죽고 사는 건 우리 뜻대로 안 된다"며 안심시키고, 그대로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총소리와 헬기 소리에 잠에서 깼습니다. YWCA 본관에서 "살려주세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람들이 줄지어 손들고 나가는 모습이 창밖으로 어렴풋하게 보였습니다. 서한성 씨는 그대로 담벼락을 넘어 바로 뒤쪽의 산부인과 건물 지하실로 몸을 피했습니다. 광주 하늘을 나는 헬기에선 자수와 신고를 독촉하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이대로 잡힐 순 없었습니다. 담벼락을 넘고 또 넘어 빈집으로, 다시 빈집에서 문 열린 술집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렇게 도망치다 보니 어느덧 전남 나주의 남평까지 와 있었습니다. 가족보다 더 가족 같았던 친구, 박용준 열사의 사망 소식은 그때 방송으로 들었습니다.

국립5.18민주묘지에 있는 박용준 열사의 묘.
"받아들일 수밖에 없잖아. '고생만 하다 갔구나' 그 생각밖엔 안 들지. 활동한 것도 뭐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니니까. "

서한성 씨는 종종 박용준 열사가 잠든 5.18민주묘지를 찾아갑니다.

"자주 가지. 제삿날에는 행사하잖아. 그런 날에는 안가. 그렇지만 항상 생각하지. '오늘이 용준이 제사인데' 하고. 용준이는 그때 담배 안 피웠는데, 나는 담배 피우니까 담배 피우고 오지. 가서. "

서한성 씨는 당시 시민군들이 "손을 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합니다. 가진 것을 잃을까 봐 손을 꽉 쥐고 있는 이들이 아니라, 열 손가락 다 펼쳐도 잃어버릴 것이 없는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저항'이라는 뜻입니다.

"가진 것 있는 사람들은 못 나타나. 가진 것 잃을까 봐. 그런데 그러지 못한 사람들 대다수가 그때 시민군이었어. 손을 펼 수 있는 사람들이 시민군이었어. 손 쥐고 있는 사람들은 할 수 없어. 자기 것을 잃을까 봐.

나도 그렇고, 용준이도 그렇고 가진 것 없어. 진짜 힘없고 가진 거 없는 사람들이 일어난거야. 그런 사람들이 더 잘 알아. 남 아픈 것을.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이 행동을 일으킨 거지."


서한성 씨는 현재 택시운전사입니다. 넉넉한 형편은 아닙니다. 거실 하나에 방 하나, 임대아파트에서 단출한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서한성씨는 5.18민주유공자 신청을 안 했습니다. 앞으로도 할 생각이 없습니다. 서한성 씨 표현 그대로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을 뿐더러, 무엇보다 자신은 살아남았기 때문"입니다.

구두가 반짝이도록 광을 내던 손, '투사회보'를 바삐 날리던 손, 40년의 세월을 지나 택시 운전대를 잡는 손. 서한성 씨는 여전히 가진 것 없고, 잃어버릴 것 없는 자신의 손으로 삶을 이어나가며, 5.18 정신을 간직해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