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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이산가족 상봉 20~25일 금강산서 열려
“지금도 반신반의하고 있다.”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돌파구 열릴까?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오는 20일 부터 25일까지 금강산에서 열릴 예정이다. 지난해 9월 추석을 계기로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갖기로 했다가 행사를 닷새 앞두고 북한이 일방적으로 연기한 뒤 5달 만의 일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봉 행사 기간 일부가 한미 연합군사 훈련과 겹치는데다, 북한이 이 훈련을 중단하지 않을 경우 이산상봉을 재고할 수도 있다고 밝혀, 행사를 앞둔 가족들의 마음이 편치 않은 상황이다. 12일 열린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획기적인 돌파구가 열릴지 관심사다. 상봉을 앞둔 이산가족들의 심정은 지금 어떠한지, 상봉 행사는 합의대로 제 날짜에 제대로 열릴 수 있을지,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앞으로 남북관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지, 2회에 걸쳐 특집분석 기사를 게재한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지난해 9월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손꼽아 기다리다 북측의 일방적인 연기로 무산됐을 당시의 심경을, 83살 장춘 할아버지는 이렇게 토로했다.


장춘(83살)

경기도 남양주시 화부읍.. 예봉산 밑자락에 있는 24평 아파트에 살고 있는 장춘 할아버지는 이번 이산가족 상봉 행사의 대상자이다. 북한에 있는 누이동생 77살 장금순씨, 막내동생 74살 장화춘씨를 만날 예정이다. 할아버지의 고향은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면 하면리 116-3번지... 남동생 2명과 여동생이 1명 있는데, 바로 밑 남동생은 이미 사망했다. 동생 2명은 현재 고향에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할아버지의 부모님은 14살 때 돌아가시고, 형제자매가 삼촌댁에서 같이 살았는데, 할아버지가 주을 고등학교 3학년 재학때 인민군에 징집됐다고 한다. 1951년 1월 인민군에 징집돼 전투에 투입됐는데, 그해 8월 양구 전투에서 유엔군에 포로로 잡혔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돼 있다가 1953년 휴전을 맞았고, 장춘 할아버지는 남쪽에 남기로 결정했다. 이듬해 특별사면을 통해 자유인이 된 뒤 국군에 자원입대해 강원도 양구의 대공포 부대에서 38개월을 복무하고 만기제대했다. 제대 후에는 제지회사, 건설업, 농협에서 근무하고 90년대 초 은퇴했다. 슬하에 1남 5녀의 자녀들이 있다. 평상시엔 잘 모르다가 유독 설과 추석 등 명절 때가 되면 고향 생각, 동생들 생각에 많이 울었다고 한다. 지난 2006년 이산가족 화상 상봉을 신청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신청했다가, 막내 동생 장화춘씨의 편지를 받고 생존을 확인했다고 한다. 북측 가족들은 할아버지가 대구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남동생 장화춘씨 가족 사진

지난해 9월 추석을 계기로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마련됐고, 장춘 할아버지는 대상자로 선정됐다. 할아버지는 꿈에 그리던 남동생,여동생을 만난다는 설렘에 부지런히 선물 보따리를 꾸렸다고 한다. 그런데 행사를 닷새 앞둔 9월 20일, 느닷없이 북한이 행사 연기를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어요. 얼마나 허탈하던지. 이번 상봉도 행사 날까지 아직 시일이 남았잖아요. 그 사이 무슨 변동이 있을지 누가 압니까? 이번에도 실패하면 저한텐 큰 충격이거든요. 저는 아직도 반신반의 하고 있어요. 막상 (금강산) 가는 날 차에 타야 가는가보다 하지.. 그리해야 저로선 (만일 또 무산돼도) 충격을 덜 받을 것 같다..“


 동생 사진 보는 장춘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지난해 9월 100만 원 정도의 선물을 마련했었다. 북측 가족에게 전달할 선물에도 일정한 제약이 있다. 고가의 귀금속은 안 되고 돈도 한 가족당 500달러로 제한된다. 선물 보따리는 2개로 제한되고, 한 개당 20kg으로 총 40kg을 넘으면 안된다. 할아버지는 학용품과 약품.초코파이 등 생활용품과 내복을 준비했다.

“제 고향 함경북도는 겨울에 무척 추워요. 외출할 때는 두건을 두르지 않으면 못 나가고 숨 쉴 때마다 고드름이 얼 정도니까. 영하 30도는 족히 될 겁니다. 가을에 첫눈이 오는데, 그 뒤로 계속 눈이 쌓여서 봄까지 갑니다.“

83살의 장춘 할아버지는 시력이나 청력 등 건강은 아주 양호한 편인데, 3년 전부터 퇴행성 관절염을 앓아 거동이 불편하다. 이번 이산 상봉 행사에 아들 장기용(54살)씨가 할아버지를 부축해 나갈 예정이다.

▶서울 목동에 사는 77살 우한식 할머니는 북한에 사는 언니가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해서 대상자에 포함됐다. 언니 이름은 우영식씨, 올해 84살이다. 아버지 우영제씨 슬하에 2남 5녀가 있었는데, 언니 우영식씨가 둘째고, 우한식 할머니가 6번째다. 우한식 할머니 집은 원래 서울시 마포구 대흥동이었다. 13살 초등학교 다닐 때 6.25 전쟁이 났는데, 언니 우영식씨는 숙명여고를 나와 간호장교 시험을 봐서 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했다. 온 가족이 피난도 못 간 상황에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학교 후원회장.청년회장은 물론 정치 쪽에서 일하시던 아버지는 다락에 숨어 지내시고, 언니 우영식씨는 병원에서 인민군 부상병을 돌보고 있었단다. 1950년 7월 7일쯤 다락에 숨어 있던 아버지는 누군가의 신고로 인민군에 끌려간 뒤 소식이 끊겼다. 7월 말쯤엔 언니 우영식씨가 마포 집에 들러 저녁을 먹고 병원으로 복귀한 뒤, 그 이튿날 동료 간호사. 의사들과 함께 북송됐다. 남은 가족들은 이듬해 1.4 후퇴 때 정처없이 남쪽으로 피란가서 전북 익산과 부산 등으로 옮겨다니다가 서울로 돌아왔단다. 20년 전쯤 어머니가 살아계실 당시 적십자사의 주선으로 납북된 가족들의 생사를 알기 위해 명단을 넣었다가, 언니 우영식씨 사연이 신문에 소개된 것을 보고, 언니의 생존 사실을 알았다. 언니 우영식씨는 김일성 대학 병원에도 근무했던 것으로 전해들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생사는 알 수 없었다. 재작년에 화상 상봉에 신청했었는데 무산됐다. 그리고나선 무심히 손놓고 있었는데, 지난해 언니 우영식씨가 거꾸로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해와서 대상자에 포함됐다고 한다. 언니가 남쪽 가족들의 생사를 어떻게 확인 했는지는 알 수 없단다. 이번 상봉에는 우한식 할머니 부부와 여동생 우명식(74살) 부부가 함께 갈 예정이라고 한다. 할머니는 지금 무슨 선물을 얼마나 싸갈지를 놓고 고민 중이다.

▶이산가족 상봉 역사 -이번 이산가족 상봉에 나서는 인사들은 지난해 9월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로 선정된 가족들이 그대로 간다. 지난해 9월에는 남측 방문단이 96명, 북측이 100명 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측에서 한 명이 돌아가시고 건강상의 이유로 11명이 빠져서 85명이 됐다. 북측에선 3명이 돌아가시고 3명의 거동이 불가해 모두 6명이 빠져서 94명이 됐다. 즉, 남측 85명, 북측 94명이 방문하게 됐다.

-남북 당국 차원의 이산가족 상봉은 1985년 9월, 분단 이후 처음 이뤄졌다. 남측에서 35가족, 북측30가족이 '고향 방문단'이라는 이름으로 각각 평양과 서울을 방문했다. 그 후 15년간 진전이 없다가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을계기로 본격화됐다. 이후 지금까지 18차례의 대면상봉을 통해 남북에서 모두 3829가족, 만 8143명이 상봉했다.

-2005년에는 화상 상봉센터가 문을 열어 2007년까지 모두 7차례에 걸쳐 557가족, 3748명이 영상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민간 차원에서는 1998년부터 2013년 9월까지 모두 3391명이 제3국에서 만났다. 그러나, 2008년 이후 남북 관계가 경색되고 북한 당국의 감시가 강화되면서 민간차원의 이산상봉은 2003년 677명까지 증가하다가 2008년 97명으로 떨어진 뒤 계속 줄어들어 2013년에는 4명에 그쳤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의 역사는 내년이면 꼭 30년이 되는데, 지금까지 당국과 민간 차원의 대면.화상 상봉을 모두 합쳐도 2만 5천 282명에 불과하다. 통일부와 대한적십자사가 공동 운영하는 '이산가족 정보통합시스템'을 보면, 지난 1988년부터 2013년 12월까지 등록된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수는 12만 9천 264명이다. 이 가운데 90세 이상은 9.3%, 80세 이상은 49.8%, 70세 이상이 80.4%로 가장 많다. 이 가운데 44.7%에 이르는 5만 7천 784명이 숨져, 생존자는 7만 천 480명뿐이다.

해마다 3천 백여 명이 이산의 한을 품은 채 눈을 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