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여기’ 있습니다”…젤렌스키의 연설은 무엇이 달랐을까?_포키 게임 우노 온라인_krvip

“우리는 모두 ‘여기’ 있습니다”…젤렌스키의 연설은 무엇이 달랐을까?_레오베가스닷컴_krvip


※ 토요일, 책을 소개합니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관이 놓여 있었던 웨스트민스터 홀, 지난 8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이곳을 찾았습니다. 홀에는 수백 명의 의원이 자리를 잡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카키색 티셔츠를 입고 연단에 섭니다. 모두의 이목이 쏠린 순간, 옆자리에 앉아있던 영국 하원의 린지 호일 의장에게 하얀색 헬멧이 건네집니다. 린지 호일 의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헬멧을 건네받습니다. 전투기 조종사용 헬멧이었습니다. 의장은 웃으면서 헬멧을 높이 들어 보였고,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깜짝 선물에 장내에는 박수가 터져 나옵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조종사의 헬멧을 린지 호일 영국 하원의장에게 선물하고 있다. 2023년 1월 8일, 영국 웨스트민스터 홀
젤렌스키 대통령이 입을 열었습니다. 평소 우크라이나어로 연설했지만, 이날은 영어로 말했습니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 헬멧은 진짜 우크라이나 조종사의 헬멧입니다. 우리 최고 조종사 가운데 한 명입니다."

분위기가 고조됐고, 그는 진짜 하고 싶었던 얘기를 꺼냈습니다.

"헬멧에는 이렇게 적혀져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 자유를 보호할 날개(전투기)를 (지원해) 주십시오.'"

박수의 물결이 다시 한번 홀에 울려 퍼졌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원하는 메시지를 성공적으로 전달했지만, 영국이 우크라이나에 전투기를 지원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영국 국방장관도 최근 '영국이 전투기를 우크라이나에 보내는 일은 이른 시일 안에 이뤄지기 힘들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젤렌스키 대통령의 웨스트민스터 홀 연설이 무의미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지금 당장 구체적 결과물을 얻지는 못했어도, 영국 의원과 시민, 그리고 서방 세계에 우크라이나의 굳은 항전 의지와 지원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메시지>는 이처럼 때로는 나라 안에서, 때로는 나라 밖에서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자유, 평화의 메시지를 전한 그의 연설문을 엮어 놓은 책입니다. 그의 수많은 연설 가운데 사람들 마음에 특히나 깊은 울림을 줬던 19편이 이 책에 담겼습니다.

영국의 작가이자 언론인인 아르카디 오스토로프스키는 젤렌스키 연설이 왜 힘이 있는지를 설명하면서, 전쟁 직후 있었던 그의 연설을 예로 들었습니다. 전쟁 발발 하루 뒤, '젤렌스키가 이미 국외로 탈출했고 그의 정부가 무너졌다는 소문'이 나돌 때, 젤렌스키 대통령이 정부 청사 앞에 서서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연설로 항전 의지를 각인시켰다는 겁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의 연설 중 가장 중요한 연설은 그가 한 가장 짧은 연설이기도 하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아무 이유 없이 전면전을 시작하고 서른여덟 시간 만에 나온 그의 연설은 32초에 불과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메시지〉, p16

젤렌스키는 '우리', '모두', '여기'라는 말로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여기'라는 단어를 반복 사용했습니다.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모두 여기 있습니다. 우리의 군인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시민 사회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독립을 지켜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처럼 앞으로도 변함없이 독립 국가일 것입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메시지〉, p17

우크라이나는 '여기' 그대로 있을 것이고, 나도 '여기' 그대로 있을 것이고, 우리 군인들도, 시민들도 '여기' 그대로 있을 것이니, 두려워할 필요 없다는 그의 메시지는 간결했고 명확했습니다. 저기, 남의 땅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 우리 땅을 침범한 저들로부터 우리가 '여기', 우리 땅을 지킬 것이고, 그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이며, 그러니 용기를 내자라는 의미였습니다.

젤렌스키는 우크라이나 말로 '투트 tut', 즉 '여기에' 있었다. 그가 일하는 자리에 출근한 상태였다. 우크라이나 국민도 그렇게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메시지〉, p18

자국민을 향한 연설에서 '여기'라는 단어를 반복해 사용하며 수호 의지를 전했던 젤렌스키는 나라 밖 사람들을 향해 얘기할 때는, 역사적 사례를 들며 구체적 표현을 자주 썼습니다. 그저 홍보를 위해 자기 할 말만 하는 구태의연한 모습의 여느 정치인들과는 달랐던 그는 무엇보다 '맞춤형 연설'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영국 사람들에게는, 나치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면서 얘기를 이어갔습니다.

우리가 시작하지도, 우리가 원하지도 않은 전쟁이지만, 우리는 이 전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것, 즉 우리나라 우크라이나를 잃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치가 영국을 침공하려 했을 때 영국 국민이 영국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영국을 위해서 싸워야만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 영국 의회 연설 / 2022년 3월 8일, 런던 (화상 연결)
〈우크라이나에서 온 메시지〉, p99~p100

미국 사람들에게는, 진주만의 기억을 상기시켰습니다.

1941년 12월 7일의 그 끔찍한 아침을 떠올려보십시오.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한 바로 그날 말입니다. 폭격기로 새까맣게 덮인 하늘을 보았을 때의 느낌을 떠올려보십시오.
· 미국 의회 연설 / 2022년 3월 16일, 워싱턴 D.C. (화상 연결)
〈우크라이나에서 온 메시지〉, p108

베를린 장벽의 아픈 기억이 있는 독일 사람들에게는, 장벽을 얘기했습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베를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벽을 허무십시오!" 저도 여러분에게 같은 말을 하고 싶습니다. 숄츠 총리님, 이 벽을 허무십시오!
· 독일 의회 연설 / 2022년 3월 17일, 베를린 (화상 연결)
〈우크라이나에서 온 메시지〉, p120

역자의 한 사람인 박상현 번역가는 역자 후기에서 '젤렌스키는 수많은 연설을 했지만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장소와 대상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상황을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요소를 찾아내 연설에 넣는다'고 말하며, 그의 연설이 그냥 나온 연설이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영국 의회를 상대로 한 연설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처칠의 연설을 인용하고, 미국 의회 연설에서는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연설을 언급하고, 독일 의회를 상대로 한 연설에서는 분단되었던 독일의 경험과 나치 시절의 뼈아픈 기억을 일깨운다. 하지만 단순한 언급에 그치지 않는다. "독일인들은 리더가 될 자격"이 있다고 말하고, "미국은 유럽과 전 세계를 돕고 있고" 세계의 정의를 유지하고 있다며 그들을 격려하고 다독인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편지〉 역자 후기, p209~210

젤렌스키 대통령이 이처럼 문화적, 역사적 맥락이 있는 얘기를 연설 중에 즐겨 하는 것은 그가 단순히 유럽이나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만을 생각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서방 민주 국가의 유권자들을 염두에 두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선거로 뽑히는 유럽이나 미국의 지도자들은 결국 여론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유럽이나 미국의 일반 시민들 마음까지 얻어야 나라마다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정책 결정을 더 쉽게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젤렌스키 대통령도 잘 알고 있다는 겁니다. 책에서 영국의 아르카디 오스토로프스키는 아래와 같이 얘기했습니다.

젤렌스키는 그 정치인들을 선출한 그 나라 국민에게 호소한다. 젤렌스키의 연설에 마음이 움직인 베를린, 파리, 런던 시민들이 대규모 우크라이나 지지 시위를 벌여 자국 정부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수준의 지원을 하게 만들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메시지〉, p 29


'독립국 우크라이나의 자유로운 국민', 이 네 마디의 말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강조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우크라이나에서 온 메시지>는 책 표지에 적힌 설명대로 젤렌스키 대통령의 항전 연설문집입니다. 저자 서문과 역자 후기 등 연설문과 관련한 배경 설명이 실려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연설문을 옮겨 놓은 책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는 젤렌스키의 지도력이 정말로 훌륭했는지, 외교적 성과를 얼마나 거뒀는지, 정치인으로서, 시민으로서 그의 실제 삶이 어떠했는지 등에 관한 얘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열아홉 편에 이르는 그의 연설문을 통해, 초강대국의 침입을 받은 나라의 지도자가 자국민과 전 세계 시민을 향해 독립과 자유, 평화와 관련해 어떤 말을 했는지, 어떻게 얘기했는지를 있는 그대로 살펴볼 수 있는 원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외교에 관한 책이기도 하면서, 말에 관한 책이고, 소통에 관한 책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책은 지난달 30일 출간됐습니다.

--------------------------------------------------
우크라이나에서 온 메시지 (2023년 1월 출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지음, 박누리·박상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