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이라도 좀 주세요”…경찰서가 결혼영상업체가 된 사연_민감한 사람 빙고_krvip

“원본이라도 좀 주세요”…경찰서가 결혼영상업체가 된 사연_도미노에서 쌍으로 이기는 방법_krvip

지난해 4월 결혼했지만, 결혼식 영상 촬영본을 받지 못한 이 모 씨의 웨딩 사진
지난해 9월, 부산에 있는 한 결혼식 영상 촬영 업체 대표가 잠적했습니다. 저렴한 가격과 업계 1위라는 이름으로 광고하며 신혼부부들을 대거 유치해 놓고는 촬영본을 제공하지 않거나, 심지어 결혼식 당일에 '노쇼'까지 하며 사라진 겁니다. 임금을 받지 못한 직원도 있고, 외주를 받아 촬영했던 업체들도 비용 정산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가장 큰 피해자는 결혼식 추억을 통째로 날려버린 신혼부부들입니다. 피해 신혼부부만 400쌍, 받지 못한 영상만 450개가 넘고, 피해 금액은 1억 5천만 원에 달합니다.

이 결혼 영상 업체 대표는 지난해 7월 말, 태국으로 출국한 것으로 경찰 조사 결과 드러났습니다. 출국한 날 업체 사회관계망서비스에 고객들을 상대로 "집중 출고 기간이니 방해 연락을 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습니다. 생애 첫 결혼의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신혼부부들은 업체에 재촉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도피한 뒤였던 겁니다.

부산 사상경찰서는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업체 대표 윤 모 씨를 태국에서 잡기 위해 '여권 무효화' 조처를 내렸고, 부산경찰청에 인터폴 적색 수배를 내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적색수배는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경제범죄에 대한 인터폴 적색 수배령을 내릴 수 있는 최소 기준인 '5억 원'보다 피해 금액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경찰은 지난 1월 수사를 중단해야 했습니다. 국제 공조가 불가능해져 윤 씨는 '소재 불명' 처리 됐습니다.

■"소중한 추억인데"…외면할 수 없었던 경찰은 결국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업체가 촬영했던 원본 영상과 사진 일부를 압수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까요? 신혼부부들은 하나둘 '웨딩 영상 원본'이 있는지 경찰서에 문의했습니다. "남아있는 원본 영상이라도 꼭 받고 싶다"고 요청한 신혼부부가 100쌍에 가까웠습니다.

경찰은 신혼부부의 사정이 안타깝지만 '수사 자료'인 압수 영상 원본을 내줄 순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호소하는 이들을 외면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복사입니다. 경찰은 찾아오는 신혼부부에게 '직접' 영상을 복사해 건네주기로 했습니다.

■ 6월까지 경찰서에 차려진 '웨딩 영상 업체'…"행적 보이면 즉시 다시 수사"

부산 사상경찰서 책상, 노트북 2대로 결혼 영상 100여 개를 옮겨주고 있다
노트북 두 대가 경찰서 책상에 설치됐습니다. '충격 접촉 주의'라는 경고문까지 붙였습니다. 신혼부부가 외장 하드를 가져오면, 원본을 복사해 옮겨 주는 방식입니다. 쓸 수 있는 예산도 없어 전문 업체에 맡기기도 어려웠으므로, 경찰서 안에서 모두 일일이 수작업으로 복사했습니다.

복사 도중 끊기기 일쑤여서 신혼부부 한 쌍의 영상을 복사하는 데 2~3시간이 걸렸습니다. 하루 꼬박 복사해도 4쌍 정도밖에 영상을 가져가지 못하는 겁니다. 남은 신혼부부의 영상까지 모두 복사하려면 줄잡아 서너 달은 걸립니다. 부산 사상경찰서는 6월까지는 난데없는 '결혼 영상 업체'를 함께 운영해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돼버렸습니다.

경찰 관계자는 "도주한 업체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며 황당해하면서도, "2주마다 신혼부부 15쌍 단위로 조를 편성해 영상을 나눠줄 예정"이라고 합니다. 특정 기간에 인원이 몰려 신혼부부도 애를 태우고, 경찰 업무도 지장이 생기는 걸 막기 위해 찾아낸 방법입니다.

피해자 A 씨는 "편집한 영상까지 받을 것을 고려해 큰 돈을 낸 건데, 이를 받지 못하게 만든 업체에 분통이 터진다"면서도, "찍었던 원본 영상이라도 받을 수 있어서 경찰에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경찰은 여전히 피의자 윤 씨의 행적이 드러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처벌을 피하려는 목적으로 해외에 도피한 기간은 '공소시효'가 정지되기 때문에, 언제든 수사를 재개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