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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줄이 당긴다는 말 있죠.

60여 년 세월의 벽도 한순간에 녹아 없어진 듯했습니다.

화면 먼저 보시겠습니다.

-아버지 없는 자식이 아니고 아버지 있는 자식이라 당당하게 서겠습니다.

-살았어.

아이고, 살았어.

누나 맞다!누나.

-아버지, 어머니는?

-다 돌아가셨어, 화병으로.

-올해는 이제 내가 꿈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나는 태어나서 아버지 처음 보는데 어떻게 알아봐.

-기쁨의 눈물이지 뭐.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집에 가서 들을 거니까 아버지가 노래 한 번만 더 해 주세요.

-한 번만?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그 긴 세월 쌓인 그리움, 사흘 만에 해소될 수는 없겠죠.

1차 이산가족 상봉에서 헤어진 아버지를 만나고 오신 분입니다.

채희양 어르신 그리고 남성욱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 자리해 주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아버님을 65년 만에 만나셨잖아요.

어젯밤에는 잘 주무셨어요? 아버님 꿈은 안 꾸셨어요? 어떻습니까?

-어젯밤에 아버지 돌아가시는 꿈을 꿨습니다.

-그러세요?

-아버지 돌아가신다고 해서 목숨이 돌아가신 게 아니고 북으로 다시 돌아가시는.

-그러니까 또 못 만나는 마음이 들어서.

-꿈이 현실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2박 3일 동안 만나고 왔는데 못 볼 것 같고 그런 마음이 들어서 꿈에서 그런 게 나타났나 봐요.

-헤어진 아버지 처음 만나셨을 때 어떤 감정이 드셨어요?단박에 알아보실 수 있으시던가요?

▼60여 년 만에 아버지 상봉한 소회는? ▼

-저는 맨 처음에 할 때 아버지를 못 알아보지 않을까 했는데 그게 천륜인가 봐요.

보자마자 어디인가.

-핏줄이 당긴다고 하잖아요.

-네, 핏줄이 당기는 것 같아서 처음에 알아봤습니다.

-화면으로 나오고 있네요.

-아버님이 연로하셨지만 그래도 저희가 화면으로 보기에는 정정하고.

어머님이 같이 가신 거죠?-네, 어머니하고 같이 갔습니다.

어머니하고 제 처하고 제 아들 둘하고 5명이 갔습니다.

5명이 갔습니다.

-아버님, 어머님도 65년 만에 재회하신 거잖아요.

결혼생활은 몇 년 하셨던 거였어요?-5년이요.

-5년 사시고 65년의 벽을 넘어서 다시 뵀는데.

부부지만 약간 서먹하셨을 수도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서먹하죠.

65년 눈물의 긴 세월이기 때문에 남이나 똑같은.

-아버님이 처음 뵀고 뭐라고 말씀하시던가요?

-아버지도 하시는 말씀도 네가 살아 있었구나.

살아 있어서 고맙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와서 네 아버지한테 너를 맡겨놓고 왔으니 너무 미안하다.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사실은 아드님 입장에서는 태어나서 처음 본 아버지인데 아버지가 80대의 아버지잖아요.

태어나서 처음 본 아버지가.

-90대죠.

-90대신가요?보통은 20대에 아버지를 보게 마련인데.

65년 만에 아버지를 만나면 사실 어떻게 보면 할 말이 없을 수도 있잖아요.

같이 생활을 한 적이 없고 추억이 없으니까.

그래도 당사자가 되면 다른 어떤 뭉클함이 있나요?

-저는 91년도인가 최문식 국회의장님이 가셔서 그때 사진으로만 봤기 때문에.

-최문식 국회의장님이 90년도에 방문하셨던 분인데 집안간이세요?-저희 아버지하고 일촌간입니다.

그래서 그때 얼굴만, 그 모습만 생각하고 올라갔는데 벌써 세월이 24, 25년 흘렀기 때문에 너무나 많이 변하셨어요.

-그 사이에 더 많이 늙으셨군요.

-그때는 허리도 곧고 풍채도 좋으셨었는데 너무나..

-그래서 또 느끼는 마음이 더 아프죠.

-더하죠.

-시간이 너무 짧았죠.

-짧죠.

시간도 2시간씩 6번을 주셨는데 너무나 짧았죠.

-처음 만나실 때 다르고 두번째 만나실 때 다르고 그러셨을 것 같아요.

-처음 만났을 때는 어딘가 모르게 서먹서먹하고.

1시간이 지나갔는데.

2시간째는 어딘가 모르게.

-벌써 가족이 된 거죠.

어제 본 가족이 된 거죠.

그런데 아드님 입장에서는 아버님이 기억이 안 나겠지만 아버님은 말이에요.

아들에 대한 기억이 있을 것 같아요.

-많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요? 어떤 게 제일 기억이 난다고 하시던가요?

-첫 돌이 지나고 걷지도 못하던 걸 벽에 세워놓고 제 웃는 모습을 보고 그 당시 웃을 적에는 양 보조개가 들어갔답니다.

-지금도 보조개가 있으신데.

-감사합니다.

-65년 전의 보조개를 기억하시는군요.

1살 아들의.

-저는 화면만 봐도 사실 눈물이 나더라고요.

저는 전쟁을 겪은 세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절절하셨을까 그 마음들이 다가오는 것 같았는데요.

이산가족 상봉 남 교수님, 쭉 보셨잖아요.

어떠셨어요?

-눈물 없이 볼 수 없죠.

우리 젊은 기자분들이 현장에 가면 처음에 담담하게 갔다가 상봉 보면 갑자기 눈물바다로 바뀌죠.

-그럴 수밖에 없어요.

-이번에 고령 상봉이라고 저희가 특징을 붙일 수밖에 없는데.

이제 12만명 중에 6만 6000명이 남았고요.

한 3만명은 연락이 잘 안 되고 있습니다.

매년 한 4000여 분이 돌아가시거든요.

고령화되는 이산가족 상봉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상봉의 정례화 그리고 서울, 평양 여러 군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상봉을 해야지만 이산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기 때문에.

정부가 이번 20차 상봉을 계기로 획기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될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이번에 올라가시는 우리 남측 이산가족들은 연세가 더 높으시다는 얘기도 있어요.

이번에 참 보시면서 여러 가족들이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사연들인데 혹시 기억에 남으시는 사연도 있으세요?-기억에 남는 사연은 아까 잠깐 화면에 나왔던 이정숙 씨.

68세의 남측의 딸인데 아버님이 찾아서 올라가서 만났습니다.

24살 때 경북의 학교 교사시험을 보고 합격통지를 받고 집 나가신 뒤에 65년 만에 만났는데 이분이 노래를 잘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꿈꾸는 백마강하고 애수의 소야곡을 불러서 이 따님이 그걸 녹음해서 이제 정말 기약없는 생이별인데 서울에 가서 아버님이 생각날 때마다 이걸 듣겠다.

그런데 노래를 65년 동안 정확하게 가사를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을 하고 계셔서 정말 놀랐습니다.

-아마 60여 년 살면서도 힘들 때마다 그 노래를 조금씩 부르셨을 거예요.

-남측 노래라 아마 공개석상에서 못 불렀을 거고.

-그래도 혼자 슬프고 고향 생각이 날 때 아마 노래를 부르셨기 때문에 음정도 잊지 않으시고 가사도 잊지 않으시고.

-아주 정확했습니다.

-마지막 상봉을 마치고 한 가족이 인터뷰한 걸 봤는데 차라리 만나지 말 걸 그랬다.

그만큼 너무나 아쉬운 마음이 크시다는 건데요.

그래서 저희가 마지막 상봉 모습을 영상으로 준비했습니다.

함께 보시면서 또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한번 볼까요.

-속절없는 시간에 상봉장 곳곳에서는 오열이 터집니다.

-우리 집에서 하루, 이틀 자면 내가 또 보내줄게.

내 차 가지고 몰고 내가 누나 집에 데려다줄게.

-남들처럼 아버지 이름을 부르는 게 소원이었던 여기 계신 채희양 어르신은 편지로 적었습니다.

-정말 고맙다.

어머니 잘 돌보고.

-김기주 할아버지는 형님이 전한 술을 들고 당장 부모님 묘소를 찾아가야 합니다.

-내가 못 가니까 네가 내 대신 아버지 산소에 부어놓으라고 얘기하대요.

-이제는 진짜 헤어져야 할 시간.

차창 너머로 필사적으로 손을 맞잡고.

-오빠 손 좀 잡아줘요.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

-꼭 만나, 약속해.

-다시 만나자며 새끼손가락을 겁니다.

-100살까지 살아, 언니.

알았지?-마침내 떠나가는 버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다 참았던 울음이 터집니다.

-금방 와, 금방 올 거라.

내가 모시고 올게.

-남 교수님, 우리가 이산가족 저 모습 참 여러 차례 봤어요.

그런데 늘 그러시잖아요.

꼭 다시 만나자고.

그런데 이산가족 중에서 다시 만나는 가족 없죠?

-네, 없습니다.

-한 번씩 오는 기회조차도 못 잡는 분들이 대부분이니까.

-1년에 100가족, 200가족 하는 상황에서 지금 6만 6000명이 대기하고 있기 때문에 한 번 만나신 분들은 또다시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그 기회를 또다시 잡는다는 게.

-그래서 정말 이제는 희망을 내려놓나 하는 아주 우리 채 선생님 나오셨지만.

다시 못 본다는 생각에 서울에 와서 아주 가슴앓이를 합니다.

-그러시겠어요, 진짜.

어떠세요? 진짜 만나시고 오셔서 더 울적해지신 건 아니에요?

-차라리 안 만났으면 다음에 만나겠지라는 기대감이라도 있지만 이번에 만나니까 돌아설 때는 진짜 이번에는 이별이구나, 영영 이별이 되겠구나.

-이번 생애 또 만날지 안 만날지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뭔가 서로 쪽지라도 주고받고 그러시는 마음이 그래서 생기시지 않을까.

-제가 그래서 아버님한테 말은 못하고 편지를 몇 자 적었고.

-지금 갖고 오신 게 그거죠?

-이건 아니고 제가 아버지한테 부탁을 드렸죠.

-부탁을.

-아버지, 저희들 한자 남겨달라.

녹음은 안 되니까.

그래서 아버지께서 저희한테 몇 자 적어왔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남북이 오래지 않아 통일이 되면 외로이 살아온 가문이 한데 모여서 행복하게 살자.

사람이 죽어서.

-가슴이 막혀서.

-저희가 괜히 읽어주시라고 부탁한 것 같아서.

-저희가 대신 읽을까요?

-여기 한번 읽어주세요.

-사람이 죽어서 영혼이 있다면 내가 죽어서 영혼이 되어서라도 고향에 가서 선조들 묘소에 가서 성묘를 드리고 고향 산천도 돌아보겠다.

아버님 고향이 남쪽이신 거예요.

문경이라고 하셨죠?

-문경입니다.

-북에 올라가셔서 문경 땅을 얼마나 밟아보시고 싶으면 영혼이 돼서 고향 산천을 돌아보겠다.

이런 얘기를 지금 써놓으셨어요.

이렇게 몇 구절을 적으셨는데.

가족분이시다 보니까 저희가 괜한 부탁을 드렸나.

감정이 또.

-괜찮습니다.

-북에서 만난 구순이 다 되신 아버님의 어머님.

우리 채 선생님한테는 할머니이시죠? 할머니는 또 그 아들이 얼마나 보고 싶으셨겠어요.

그전에 편지를 또 남기신 게 있으시다고.

-24년 전에 전 국회의장 최문식 씨가 가셔서.

제 아버지하고 최문식 국회의장은 10촌간입니다.

-지금 화면을 살짝 미리 준비했는데 할머니이신 거죠?

-저희 할머니.

-저 종이가 할머니가 쓰신 편지 같은 거죠?

-편지입니다.

-저희가 좀 멀어서 그러는데 잠깐 읽어주시겠어요.

-훈식아, 너는 오래오래 살아 남북통일이 되거든 속히 돌아와서 잘 살기 기원 축수축수.

42년 동안 네 얼굴 못 보고.

노심초사 지내다가 훈식이 생존 망불하다가 문식이 보고 왔다더니 문식이 직접 만나 너의 사진 보고 또 보고 죽어도 여한이 없다.

어미 대신 사진 보고 부디부디 건강히 잘 살기를 축수축수한다.

-지금 보니까 나를 보듯이 사진을 봐라라고 하면서 글을 쓰셨는데.

-이 사진에 글씨를 써서 자기 영정사진 뒤에 꽂아놨더라고요.

-할머니가?

-네.

-그러면 이번에 갖고 가신 건 아니에요?-아니에요.

가져갔죠.

-이번에 가져가서 아버님한테 보여드렸습니까?

-드렸습니다, 직접.

-이번에 쌀도 가져가셨다고요.

-네, 쌀을.

-거기서 밥을 짓고 이럴 수는 있는데 왜 쌀을 가져가셨어요?

-제가 65년 동안 살면서 결혼을 40년 전에 했는데.

제 처하고 살면서 아버지를 모셔야 되는 의무를 가지고 있잖아요.

한 번도 밥을 못해 드려서.

원래 첫 수확한, 제가 농사 짓기 때문에 첫 수확한 쌀입니다.

-고향의 햅쌀을 가져가고 싶으셨군요.

-그래서 직접 밥을 못 해 드리지만 가서 밥 한 끼 잡수시면 좋겠어서 쌀을 조금 가져갔습니다.

-그걸 드실 수 있으실지 모르겠어요, 아까워서.

-세월이 자꾸 가니까.

-본인은 못 잡수신다고.

-그러실 것 같아요.

-구순이 다 되셨는데.

이번에 2차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이번에 남측에서 올라가신 분들은 남측에서 북측 가족들을 찾는 분들인데.

그만큼 연세가 사실은 더 되신 분들이 많으시잖아요.

지금 이게 이산가족 고령화, 고령화 한두 해 얘기한 게 아닌데 이제는 정말 찬 게 아닌가 싶어요.

이제는 이 문제를 풀지 않으면.

▼ 이산가족 고령화 심각 ▼

-그렇습니다.

이번 상봉을 보면서 한 5년 지나면 이산가족 상봉이 당대에서 이루어지겠느냐.

부자지간, 부모자식간에.

이제는 조카, 삼촌을 찾는 이산가족 상봉은 아무래도 의미가 약해지지 않느냐.

그래서 정부가 정말로 이제 나서야 될 시간이다.

아까 통일이 돼서 우리 다시 만나자라는 작별상봉에서의 화면들이 많이 나왔는데 통일을 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리겠죠.

그러니까 그 이전에 정부가 정말 이산가족 차원 문제를 해결해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예산도 투입하고 북한 당국을 설득해서 조기에 6만 6000여 명의 대기 이산가족의 한을 풀어줘야 될 것으로 보입니다.

-저희가 그래픽 화면 준비한 게 있을 텐데.

우리 PD, 그래픽 화면 준비된 게 있죠?방금 말씀을 해 주셨는데 저희가 구체적으로 보여드리는 차원에서.

-이번에 2차 상봉하실 분들이 90분인데요.

고령의 상봉자들이 참 많습니다.

-이미 6만여 명이 돌아가셨다는 얘기죠.

-13만 409명이 신청을 했습니다, 2000년에.

그래서 6만명이 돌아가시고요.

현재 6만 6000여 명이 생존하고 있는데.

매년 4000분씩 돌아가십니다.

그러니까 한 10년 지나면 정말 당사자들이 다.

-지금 보니까 연령이 80대가 제일 많으시고 90대 이상도 10%가 넘으세요.

그러니까 이분들이 지금 아무리 정정하시다고 해도 팔십 넘어가시고 그러면 사실은 시간이 이제 많이 남지 않으신 거잖아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6만명의 생존자가 있는데 지금 매년 100명 단위로 만났어요.

그것도 매년 할까말까이긴 하지만요.

그렇게 해서는 이게 가능하지 않지 않습니까? 시급한 대책이 필요할 것 같아요.

-작년 2월에 하고, 19차 상봉을.

그리고 20차 상봉을 금년 10월 하순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1년에 평균 1.3회라고 통계가 나오는데 이렇게 해서는 6만 6000여 명의 이산가족의 한을 풀 수가 없기 때문에 정부가 이 문제에 관해서는 독일식 해법을 저는 제안합니다.

프라이카우프라고 해서 돈 주고 자유를 산다.

그래서 과거에 서독이 동독의 정치범들을 석방할 때 1인당 6000여 만원의 현금을 교회 등을 통해서 전달하고 사람들을 동독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우리도 프라이카우프 방식을 벤치마킹해서 정부가 비료라든가 식량 문제에 관해서 인도적 차원에서 대규모 지원을 하고 이 남은 가족들의 이산가족 상봉을 정부가 적극적으로 북측에 설득을 해야 될 것으로 보입니다.

-돌아가시면 영영 기회가 없어지는 거기 때문에 마음이 더 급해지는데요.

화상상봉 이런 것도 가능하지 않습니까?-서신제, 왕래, 생사확인들은 하고 있는데 그것만 가지고는 아무래도 이산의 아픔을 달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채희양 선생님, 기약없는 이별을 하고 오셨는데 바라시는 점이 있으시죠?어떤 게 좀 됐으면.

지금 이런 화상상봉 말씀도 하셨는데.

-마지막 작별상봉까지 마치고 왔는데.

이번에는 북측 가족이 먼저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돌아왔는데 북측 가족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지금 돌아가시면 언제 다시 만날지.

아니면 서신이라도 교환할 수 있을는지.

제가 바라고 싶은 건 정례가 안 되더라도 서신이나 전화 연락.

서로 살았나 죽었나 연락이라도 했으면.

-전화라도 해고 편지라도 했으면.

진짜 그 정도도 못하는 상황이 참 안타깝네요.

-이산가족 상봉이 정례화되면 남북 관계에도 훈풍이 불지 않을까 싶어요.

-정말 훈풍이 불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20차 상봉을 계기로 해서 남북 관계가 좀 더 한층 발전해서 이산가족 문제가 조기에 해결됐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계절은 추워지는데 남북 관계 좀 따뜻한 온기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질문 드려봤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