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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때 입은 부상으로 오른팔을 아직도 제대로 못 쓰지만 국가를 원망한 적은 없어. 나 같은 사람들이 싸워서 조국의 공산화를 막았고 오늘의 한국이 존재하는 것 아니겠어." 6.25 전쟁 때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곳 중의 하나인 강원도의 금화전투에서 공을 세워 58년만인 25일 뒤늦게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송수영(82.당시 이등중사)옹에게는 훈장을 받은 기쁨보다 조국을 수호했다는 자부심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송 옹은 전투 직후인 1951년 12월3일 소속인 육군 제2보병사단장으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 대상자로 선정됐지만 지금껏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사단장으로부터 훈장 수여 대상자라는 증서 같은 것을 받았는데, 그것만으로 족하다 생각했어. 훈장을 꼭 받아야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 그가 목숨을 내놓고 싸웠던 곳은 6.25전쟁 최대 격전지로 꼽히는 강원도의 철원-평강-금화 지역을 일컫는 이른바 `철의 3각지역' 중 하나다. 이 지역은 전쟁 3년 내내 아군과 적군의 교전이 끊일 날이 없을 정도로 치열한 전장터였다. 송 옹이 기억하는 바로 그곳, 1951년 가을의 금화지역은 밤낮으로 주인이 바뀌는, 말그대로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는 "낮에는 아군이 화력을 퍼부어 고지를 점령했다가도 밤이면 적들이 기습공격을 해 고지를 다시 빼앗기는 등 밤낮으로 주인이 바뀐 곳"이라고 회상했다. 전쟁 발발 직후 입대했던 그는 신병교육대에서 훈련을 받다 운좋게도 10대1의 경쟁을 뚫고 200명을 선발하는 육군본부 요원으로 발탁됐다고 한다. 대구와 부산에서 전투를 치르지 않고 근무하던 송 옹은 그러나 1951년 2사단에 배속됐고 하사 이상 계급의 전방배치 방침에 따라 금화전투에 투입됐다. 분대장이란 막중한 임무를 맡았음에도 전투경험이 전무해 분대원들로부터 `괄시'를 받았던 그는 단 한 번의 사건으로 상황을 바꿔놓았다. "금화지역 옆에 비둘기 고지에 있는 중공군을 정찰하라는 명을 받고 분대원들을 데리고 갔는데, 너무 험난해선지 가다보니 나 혼자더군. 계속 올라갔더니 중공군들이 보였는데 순간 수십발의 총탄이 내게로 날아왔지. 다행히 다치진 않았는데 이 사건으로 분대원들을 휘어잡았지. 허허.." 중공군 현황을 소대장에게 보고한 송 옹은 그날 밤 분대원들을 이끌고 소탕작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아래에서 위로 향한다는 건 너무나 위험해 분대원 1명만을 데리고 적진으로 향했고 결국 2명을 사살하고 10명을 생포하는데 성공했다. "진지속에 있던 중공군들이 우리의 숫자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고 생포하기 위해 총을 연사식으로 진지 옆으로 수십 발을 쐈지. 그리고 중국말로 항복하라고 했더니 밖으로 총을 하나둘씩 던지더라구. 결국 한명씩 나오는 적을 생포했지." 이렇게 공을 세운 그도 금화전투에서 날아오는 적의 150㎜ 야포를 피하지 못해 의식을 잃고 말았다. 깨어보니 오른팔과 어깨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부상으로 휴전 직전인 1953년 4월 명예제대를 한 송 옹은 이후 국군병원과 보훈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밥을 먹을 때도, 글을 쓸 때도 왼팔을 사용했다고 한다. 5조각이 난 어깨가 너무 아파 보훈병원에서 수술을 하려 했지만 하지 않는게 더 낫다는 의사의 얘길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도 진통제에 의존하고 있다. 경기도 분당에서 큰 딸과 함께 살고 있다는 송 옹은 마지막으로 정치인들을 향한 따끔한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만일 6.25때 우리가 지키지 못했다면 이 땅에 민주주의가 어디 있겠어. 우리가 수호했기에 오늘의 한국이 있는거지. 이 나라 정치인들은 그런 것을 알고 정신차려서 여야가 싸우지 말고 안보와 민생에 힘을 좀 더 써야 되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