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 살육하라”…1:30000의 비밀_잭 포커 카운트_krvip

“전원 살육하라”…1:30000의 비밀_브라질이 승리할 경우 경기 날짜_krvip

일본 시코쿠 지역의 도쿠시마현 아와시, 최근 이 소도시 외곽의 공동묘지에서 118년 전 숨진 한 일본군 병사의 묘비가 발견됐습니다. 묘비의 주인공은 예비역 군인인 후비 보병으로 참전한 당시 38살 스키노 도라키치, 1894년 갑오년에 조선에서 소요 사태가 나자 소집됐고, 그해 12월 10일 충청도 연산현에서 동학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고 새겨져 있습니다. 이 비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조선 농민군 토벌대로 활동한 그의 행적을 칭송하는 뜻에서 세웠습니다. <인터뷰> 묘지 관리인: "이 주변은 이 사람 무덤인데 아무것도 없으니까 사람이 오지 않는다는 증거에요. 지금이 헤이세이 24년이니까 100년 정도 됐네요." 스키노는 그러나 지금껏 동학농민군과의 싸움이 아닌 청일전쟁 전사자로 전해져 왔습니다. 1860년대 이후 일본군의 역사와 전사자를 기록한 책인 야스쿠니신사 충혼사(史), 1935년 간행된 이 자료에는 스키노 상병이 충청도 연산이 아니라 청일 전쟁의 첫 격전지인 성환에서 숨진 것으로 조작돼 있습니다. 전사한 날짜 또한 묘비와 달리 성환 전투 당시인 7월로 짜맞춰졌습니다. <인터뷰> 이노우에 가쓰오(홋카이도대 명예교수) : "역사가 개변되는 어떤 시기가 있었는데 그 어딘가에서 지도부나 누군가의 의도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묘비는 100여 동안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역사의 진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스키노 상병 등 이곳 시코쿠 출신들로 편성된 후비보병 제19대대는 '조선의 반란군 토벌'이란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하지만 제국 일본은 스키노 상병의 사망 기록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감추고 싶었던 걸까요? 후비보병 제19대대의 행적을 추적해 봤습니다. 일본 시코쿠의 주요거점인 마쓰야마 시,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전장인 조선에서의 영향력 확대와 보급품 확보를 위해 이곳에서 예비 병력을 소집했습니다. 당시 지역 신문에는 조선으로 파견될 후비보병 19대대의 소집 상황이 자세히 소개돼 있습니다. '처와 사별하고 어린 사내아이를 키우며 소작일을 하던 남자에게 소집명령이 도착했다. 마을 총 대표는 국난을 맞아 개인의 사정을 버리고 천황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사내는 방안으로 들어갔고 곧이어 아이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30대 예비역 가장들까지 대거 참전하자 조선에 대한 관심은 점차 늘어났고, "일본과 전장을 연결하는 군용 통신선에 대한 조선인의 방해가 심화되고 있다.." 청일전쟁의 승리를 위해 동학농민군을 강경 진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졌습니다. "일본 병사는 조선의 동학당을 진압함에 있어 극단적인 강경책을 써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는다" 일왕을 정점으로 설치된 전시 최고통수기관인 히로시마 대본영, 대본영의 병참 총감인 가와카미 소로쿠는 당시 척왜, 즉 일본 배척을 기치로 내건 조선의 동학농민군 토벌을 위해 비밀 작전을 지시했습니다. <녹취> 비밀전보 내용 : "동학당에 대한 조치는 엄열함을 요한다. 향후 모조리 살육하라" (1894.10.27) 청일전쟁의 당사국도 아닌 조선의 민간인들을 살육하라는 일본 정부 차원의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학살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인터뷰> 강효숙(박사) : "당시 일본군의 병참기지 역할을 했던 조선의 안정이 무엇보다도 일본군에게는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철저한 동학농민군 토벌이 필요했었던 것이고, 이 명령은 바꿔 말하면 일본군의 해외 민중학살의 첫번째 명령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후비보병 19대대는 바로 이 전원살육작전에 따라 마쓰야마에 집결해 조선으로 건너갔습니다. <인터뷰> 박맹수(교토대 교수) : "이 부대가 전원살육작전을 진행하게 되고 그속에서 동학농민군들이 최소 3만에서 5만 명이 희생됩니다. 그래서 결국 동학농민혁명은 후비보병 19대대의 잔인한 살육작전에 의해서 좌절된다..." 계백장군의 '황산벌 전투'가 펼쳐졌던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공주의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농민군들에게 대승을 거둔 일본군 19대대는 남하를 계속하며 이곳 연산현청에 주둔했습니다. <인터뷰> 조중헌(향토사 연구원) : "동태를 살필 수 있는 좋은 그런 곳이기 때문에 아마 이 위에서 밤을 세워가면서 이렇게 감시도 하고 조망도 보고 그런 것 같습니다." 19대대 상병 스키노 도라키치는 이곳에서 고갯길을 넘어 행군하다 매복해 있던 농민군의 총탄에 맞아 숨졌습니다. 스키노의 묘비는 당시 농민군과의 전투상황을 "폭력적인 무리가 사방에서 다가온다. 탄알이 번개같고 검은 연기가 솟아올라 지척의 상황마저 똑똑히 볼 수가 없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조중헌(향토사 연구원) : "동학군이 숫자는 많은 거 같이 보여도 훈련받지 않은 그런 농민들이기 때문에 정규군인 일본군에 대항할 수가 없어 가지고 거기서 많은 사상자가 났는데..." 조선의 내정개혁과 일본세력 척결을 주장한 농민군의 무기는 낡은 화승총과 죽창, 낫 등에 불과해 기관총과 소총 등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조선 정부군을 지휘하며 농민군 토벌작전을 벌인 19대대의 공식 사망자 수는 모두 36명, 그러나 전투중 사망자는 스키노 상병이 유일하고 나머지 35명은 전투가 아니라 질병 등으로 병원에서 숨졌습니다. 반면 농민군은 사망 최소 3만 명, 부상자까지 더한 사상자는 30-4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인터뷰> 이노우에 가쓰오(홋카이도대 명예교수) : "농민군을 향해 라이플총을 쏴서 많은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그 속에서 일본군의 희생자가 한명이라는 것은 농민군이 이른바 죽이는 부대가 아니라서가 아닐까요?" 일본 후비부대의 이같은 학살 만행은 동학군 토벌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1895년 10월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일본 영사의 표현대로 '역사상 고금을 통틀어 전례가 없는 흉악 사건'의 유력한 시해범인 미야모토 다케타로 육군 소위는 일본이 서울 장악을 목적으로 파견한 또 다른 후비부대인 18대대 소속입니다. 최근 발견된 미야모토의 서한에는 명성황후를 시해하기 한해 전 19대대를 도와 동학군 토벌과 정탐 활동을 벌였다는 내용이 남아있습니다. <인터뷰> 나카츠카 아키라(교수) : "농민군 토벌 작전으로 한껏 흥분한 그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기 전까지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요. 조선에 계속 있다가 명성황후 시해 때 경복궁에 난입했습니다." 청일전쟁을 기점으로 자행된 동학농민군 학살과 명성황후 시해...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 독립을 위해 청나라와 싸웠다는 이른바 '정의의 전쟁'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학살과 만행의 기록을 조작하고 숨겼습니다. <인터뷰> 나카츠카 아키라(나라여대 명예교수) : "동학농민군에 의해서 죽은 일본군 병사가 한 명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야스쿠니 신사에는 그게 동학농민군 때문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죽었다고 돼 있잖아요? 그러니까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은 싸운 적이 없다는 주장이 메이지 시대 때부터 쭉 이어져 온 겁니다." 후비 부대가 소집된 마쓰야마의 항구에서는 해마다 불꽃 축제가 열립니다. 110여 년 전에도 농민군 토벌 등 조선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귀향한 병사들을 위한 불꽃이 터졌습니다. "항구에는 군부 대표, 현 지사, 현 의원, 음악대 등이 마중 나왔고, 부대 상륙중에는 불꽃을 쏘아 올렸다. 학생이나 시민 등 수백 명이 맞이했다. '정의의 전쟁'으로 포장된 학살의 만행은 침묵 속에 잊혀져갔습니다. 서른 두 살에 인천에서 각기병으로 사망한 스키노와 같은 제19대대 병사 '코노 쥬조', 증손자인 코노 치카히로 씨는 연구를 목적으로 방문한 한국과 일본의 학자들에게 초상화 한 폭을 내어 보이며 희미한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인터뷰> 코노 치카히로(병사자 증손자) : "청일전쟁 때문에 한국에 건너갔다 이 정도 밖에 몰랐습니다. 동학이라는 것은 이번에 처음 들어봤습니다." 자료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된 증조할아버지와 후비 부대의 실상은 코노 씨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남겼습니다. <인터뷰> 코노 치카히로 : "여러분께 여러가지 이야기를 듣고 평화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에서 사망한 일본 후비 부대원들은 지역 사회의 칭송을 받으며 당시로선 꽤 큰 묘비를 남겼습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시코쿠의 가난한 농촌에서 어렵게 살던 농민들이었습니다. 군국주의의 정점인 대본영의 소집 명령을 받고 조선 농민군 살육 작전을 수행해야 했던, 그래서 자신의 사망 기록마저 조작 당한 또 다른 피해자들... 살아서 침묵한 이들은 이제 묘비로나마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