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유일 ‘보석가공 명장’ 김찬씨 _조고 덩커스는 포커가 아니다_krvip

국내 유일 ‘보석가공 명장’ 김찬씨 _캘리포니아 카지노 포커_krvip

"보석을 깎다 한번만 삐끗해도 바로 깨뜨려 버립니다. 수백만원 짜리가 될 것 같아도 실수를 하면 여지없이 끝내버리죠" 20평 남짓한 공간에 울퉁불퉁한 회색 돌멩이부터 보랏빛 영롱한 자수정 조각까지 한 데 모여있었다. 44년째 천연 보석을 가공해온 김 찬(金 燦.58)씨가 전북 익산시 영등동에 마련한 작업장 겸 사무실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김씨는 생활고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14살이던 1963년 시내 보석가공 공장에 취직, 평생을 보석 깎는 일에 바쳐오고 있다. 2005년 11월 노동부로부터 국내 유일 '보석가공 명장'으로 지정받고도 "내 마음에 차지 않는 보석은 깨뜨려 버린다"며 외고집을 꺾지 않는 그를 작업장으로 찾아가 만났다. 한국의 보석 가공 기술은 6.25 전쟁이 끝난 뒤 서양 방식이 도입되던 1960년대부터 대중화했다고 한다. 기존 비취와 호박 등으로 왕관과 비녀 등을 만들던 전통 가공 기술과 달리 자수정과 황옥(토파즈), 석류석(가넷) 등 천연 보석으로 반지와 팔찌 등을 만들게 됐다. 이러한 신(新) 보석 가공 기술을 도입, 활성화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해온 김씨는 "1960년대 국내에는 연마(커팅) 도안 조차 없어 미군 부대에서 서양 잡지를 빼내 기술자들끼리 공장에 모여 독학해야 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회색을 띄는 울퉁불퉁한 돌멩이 상태인 원석(原石)으로 보석을 깎아 내려면 10가지가 넘는 과정에 수십번의 손품을 팔아야 한다. 필요한 크기대로 재단해 낸 원석을 흐르는 물에 대강의 모양을 잡으면서 깎아낸 뒤 연마, 다듬기, 광택내기 등을 거친다. 이중 연마 방법이 얼마나 정교한가에 따라 보석의 휘광(brilliance)과 반사(internal reflection), 광채(fire) 등이 결정된다. 김씨는 "합성석과 달리 원석은 한번 태어났다가 그대로 사라지는 것"이라며 "기술자가 한번 실수하면 그 원석은 보석으로 태어나지 못한 채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원석을 고르는 눈이 날카롭고 손끝이 꼼꼼하다는 평가를 받던 김씨는 보석 가공일에 입문한지 6년 만인 1969년 19살 나이에 독립, 개인 공장을 차리고 본격적인 기술 개발에 나섰다.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사온 거북이 한마리를 줄에 매놓고 등껍질 문양을 본떠 '타원형 거북 커팅'을 개발하는 등 40여년에 걸쳐 200여개의 가공연마 기술을 내놓았다. 1975년에는 "좋은 원석을 직접 찾겠다"며 경남 울주군 일대에 광산을 사들여 자수정 도매업을 벌였으며 1982년 익산으로 옮겨와 터를 잡고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기념한 축구공 커팅, 태극문양 커팅을 내놓기도 했다. 입소문을 타고 국내 소매상과 면세점 등에 납품 계약이 줄을 이으면서 한때 20억원에 달하는 연매출을 올리던 김씨도 1990년대부터 중국산 합성석이 대량으로 유입되고 경제 불황이 겹치면서 차츰 사업 규모를 줄여야만 했다. 기술을 남겨주기 위해 문하생도 10여명 들였지만 "벌이가 되지 않는다"며 떠나가 현재는 슬하에 둔 1남1녀중 막내딸인 승희(32)씨가 대학원에서 보석디자인을 전공하며 틈틈이 김씨의 작업장을 찾아 '가업'을 잇고 있다. 예순 나이에 가까워지면서 기력이 떨어지고 눈도 침침해져 작업장에 앉아있는 시간이 줄어들게 됐다고 김씨는 말한다. 그러면서 김씨는 "아직도 원석을 처음 만나는 순간 어떤 보석으로 만들어야 할지 한 눈에 떠오른다"면서 "50년 역사를 가진 국내 보석 연마 기술을 한자리에 모은 전시 공간을 작게나마 마련하는 것이 앞으로의 목표"라며 돋보기 안경을 고쳐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