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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극동 러시아, 한국 등 당신이 태어나고 자란 극동지방에 많은 향수를 느끼셨습니다." 깨끗이 면도 된 대머리와 카리스마 넘치는 눈매, 이국적인 용모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화배우 율 브리너(1920∼1985년)의 아들 록 브리너(63.뉴욕주 마리스트 컬리지대교수) 씨는 아버지를 이렇게 회고했다. 율 브리너는 1920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나 7살까지 살다 중국 하얼빈으로 이사를 했고 당시 일제 치하에 있던 조선땅에서 벌목업과 숙박업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매년 여름 북한 함경도 지방에서 보내곤 했다고 록 브리너는 전했다. 그는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증조부가 체포되고 재산을 압수당하는 바람에 당시 7살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함께 중국 하얼빈으로 이사를 하게 됐다"며 "그 후 할아버지가 한국에서 벌목업을 하는 등 사업을 하는 관계로 아버지는 어린 시절 매년 여름을 한국에서 보내 '서머 코리안 보이'라고 불렸다"라고 소개했다. 최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된 태평양영화제 참석차 방문한 록 브리너는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정말 좋은 아버지('원더플 파더')였다"며 "특히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자 베트남 어린이 2명을 입양해 키울 정도로 정이 많으신 분이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한편 율 브리너가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던 생가는 지금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남아있다. 블라디보스토크 항 주변 아울렛스카야 16번지에 있는 율 브리너의 생가는 이 항구를 개발했던 주역 중의 한명인 율 브리너의 스위스계 러시아인 할아버지가 1910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직접 수송해온 벽돌과 대리석으로 지은 지상 3층 규모의 대저택으로 지금은 '페스코'라는 선박회사의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생가는 도로에서 대리석 계단을 따라 언덕 위로 오르면 볼 수 있는 노란색 건물로 1층 외벽에는 가로·세로 50㎝ 크기의 동판에 영어와 러시아어로 '1920년 7월 11일에 율 브리너가 태어났다'라는 설명과 함께 왼손으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형상화돼 있다. 생가 앞에는 100년이 넘었을법한 나무들이 있고 다소 깔끔하게 단장된 조그만 정원이 있으며 건물 앞에는 배의 닻을 형상화한 주물로 된 두꺼운 울타리가 설치돼 있다. 율 브리너는 한국과 중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이후 13세부터 프랑스 파리의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1940년대 미국으로 진출, 1951년 뮤지컬 '왕과 나'에 출연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의 주요 작품은 '왕과 나', '십계', '솔로몬과 시바 여왕', '황야의 7인' 등이 있으며 1985년 폐암으로 별세했다. 록 브리너는 "한국 특히 북한과 깊은 인연이 있어 지금도 남북관계에 대해 관심이 많다"며 "앞으로 남북관계가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으로 기대하고 꼭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