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거 없는 비방과 무분별한 의혹 제기가 지속되면 당헌·당규에 따르는 엄중하고 직접적인 제재를 가할 것입니다." |
국민의힘 3·8 전당대회 선거관리위원회가 어제(17일) 후보자들에게 이런 내용의 경고장을 날렸습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당연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뒷말이 나온 건 경고 시점이었습니다.
최근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코너에 몰린 김기현 후보 측이 '비방·흑색선전'을 하고 있다며 안철수 후보에 대해 엄중 조치를 요청한 지 하루 만에 나온 '속전속결' 경고장이었기 때문입니다.
■ 황교안 '꺼내고', 안철수 '띄우고'
발단은 지난 15일 첫 TV 토론회, 황교안 후보에서 비롯됐습니다.
황 후보는 주도권 토론에서 김기현 후보를 향해 'KTX 울산 역세권 연결 관련 의혹'을 꺼낸 뒤 "용기 있게 사퇴하라"고 일갈했습니다.
그러면서 "김 후보 소유의 땅을 지나가도록 휘어지게 노선을 변경했다는 의혹, 그래서 3,800만 원을 들여 산 땅에 엄청난 시세 차익이 생겼다는 의혹을 명확하게 해명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다음 날인 16일, 광주에서 열린 호남 지역 합동연설회에선 안철수 후보도 가세했습니다.
안 후보는 “어제 TV토론에서 김 의원은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며 “부동산 문제는 국민의 역린인데, 김 후보가 당 대표가 되면 내년 총선에서 민주당의 대장동 비리를 심판할 수 없다"고 직격했습니다.
역린(逆鱗)은 '용의 목 아래 거꾸로 붙어 있는 비늘'을 가리키는데, '권력자의 노여움'으로 비유됩니다. 역린을 건드린다는 것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치면 '선을 넘는다'는 얘기입니다.
■ 김기현 "가짜 뉴스 퍼 나르는 민주당식 DNA" 반격
김기현 후보는 즉각 반격했습니다.
안철수 후보 연설 직후 마이크를 잡은 김 후보는 "땅 투기 의혹은 전 정부가 1년 반 동안 수사했지만, 아무것도 나온 게 없는 '가짜뉴스'"라며 "오히려 안 후보가 민주당식 DNA'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김 후보는 "우리 당 내부 사정을 알아야 일을 하는데, 민주당식 프레임 (씌우기를 따라)하면서 내부 총질하는 후보를 용납하시겠습니까?"라며 안 후보의 정체성을 거듭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김 후보 캠프는 해당 의혹을 다뤘던 언론사의 팩트체크 기사를 잇달아 기자단에 배포하며 긴급 진화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 '온도 차' 느껴지는 선관위의 대응
그리고 어제(17일) 아침, 김 후보 캠프는 "안 후보의 의혹 제기가 명백한 비방, 흑색선전 및 인격 공격에 해당한다"며 "국민의힘 3·8 전당대회 선거관리위원회에 엄중 조치를 요청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공지가 나오고 불과 8시간 뒤, 선관위는 국회 소통관에서 전격 기자회견을 가졌습니다. 기자회견장엔 선관위원장과 선관위원들이 일렬로 도열해 권위를 더했습니다.
앞서 안철수 캠프 측의 '당 소속 의원·당협위원장의 김 후보 지지 선언', '예비경선 결과 유출 의혹', '합동연설회 비표 배분 문제' 등 잇단 문제 제기에 선관위가 구두·서면으로 답하거나, 입장문을 냈던 것과는 분명 '온도 차'가 있었습니다.
배준영 선관위 대변인은 회견 후 기자들과 만나 '무분별한 의혹 제기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느냐', '김 후보의 부동산 투기 의혹 제기를 지칭하는 거냐'는 물음에 "최근의 상황이다. 유흥수 위원장 발언 내용 그대로 이해해 달라"며 말을 아꼈습니다.
■ 비대위·대통령실·선관위마저… '사면초가' 안철수
선관위의 지원 사격으로 김기현 후보가 당권 레이스의 먹구름을 걷어낸 직후, 안 후보 측은 "선관위의 걱정과 독려를 존중한다"는 논평을 냈습니다.
하지만 안 후보 캠프 관계자는 KBS와 통화에서 "기울어진 운동장 그 자체"라며 "비대위도, 대통령실에 이어 선대위마저 너무 편향적"이라며 불편한 속내를 털어놨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며 이달 초 이진복 대통령실 정무수석을 비롯한 대통령실의 '안 후보 공개 비판'이 데자뷔처럼 떠올랐습니다.
안철수 후보의 '윤·안 연대' 발언을 문제 삼아 정진석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을 찾았던 이 수석, 윤 대통령의 강한 불쾌감을 전달하면서도 '관저 단독 만찬'을 내세워 '윤심'(尹心·윤 대통령 의중)을 내비쳤던 김기현 후보에 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친윤계의 집중포화, 대통령실과의 불화도 모자라 당 비대위에 이어 '심판' 격인 선관위마저 안 후보를 흔드는 상황, 그야말로 '사면초가'입니다.
거듭되는 악재 속에 안철수 후보가 김기현 후보와의 대결을 결선 투표까지 끌고 갈 수 있을지, 남은 3주 전대 레이스의 또 다른 관심거리입니다. 국민의힘은 다음 달 8일, 차기 당 대표를 뽑는 전당대회를 개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