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에 허덕이던 중국 소녀, 뉴질랜드 장관 됐다 _리우데자네이루에서 베토 카레로까지_krv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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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을 가난 속에서 보내던 중국인 소녀가 뉴질랜드에 이주해 아시아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장관 자리에 올랐다. 지난 8일 총선에서 승리한 뉴질랜드 국민당의 존 키 총리 당선자는 17일 내각 명단을 발표하면서 중국 상하이 출신의 팬시 웡(53) 의원을 소수 민족부 장관과 여성부 장관에 임명한다고 밝혔다. 그의 정치 이력에는 언제나 '아시아 출신으로는 처음'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닐 만큼 도전과 개척정신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시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지난 1996년 국민당 비례대표 후보로 뉴질랜드 중앙 정치 무대에 진출한 것도 그였고, 이번 총선에서 아시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오클랜드 보타니라는 지역구에서 큰 표 차이로 당선된 것도 그였다. 그런 그가 이제는 아시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새로 출범하는 뉴질랜드 국민당 정부에서 장관직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웡 의원은 장관에 기용된 뒤 뉴질랜드 언론에 자신을 장관에 임명한 것은 뉴질랜드라는 나라는 어떤 사람이라도 이주해 살 수 있고 성공도 할 수 있는 열린 사회라는 메시지를 전 세계에 보낸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의 이같은 발언은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웅변이 돼 귀가 쟁쟁하게 들려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다섯 살 때 가족들과 함께 홍콩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면서 이주민의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홍콩에서의 생활도 가난에 허덕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선원인 아버지는 일 때문에 1년에 6개월은 집을 비웠고 어머니와 자신 등 4명의 식구들은 무려 일곱 가정이 바글바글 모여사는 한 아파트 층의 방 한 칸을 겨우 얻어 생활하지 않으면 안됐던 것이다. 당시 상황에 대해 웡 의원은 "그 때 그 아파트에는 모두 40여명이 함께 살았는데 부엌 하나, 화장실 하나, 욕실 하나를 모두 공동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가난의 쓰디쓴 맛을 경험할 만큼 했다"고 토로했다. 환경이 그토록 열악했지만 교육의 혜택을 전혀 받아보지 못한 부모는 자녀들에게 더욱 나은 교육과 더 나은 생활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있는 힘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고 그는 회상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배우지 못한 부모들이 은연중에 심어준 가치관, 다시 말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열심히 일하며 굳은 의지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라는 가르침 덕분이라고 말했다. 웡 의원의 삶의 터전이 갑자기 홍콩에서 뉴질랜드로 바뀌게 된 것도 제대로 배운 게 없이 배를 타던 아버지가 우연히 뉴질랜드에 기항했을 때 뉴질랜드라는 나라를 눈으로 보고 문득 이민을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1974년, 웡 의원의 나이 19세 때였다. 크라이스트처치에 정착한 가족들은 생선과 감자튀김을 만들어 파는 가게와 싸구려 햄버거집 등을 운영했고 웡 의원은 캔터베리 대학에 다니면서 시간을 쪼개가며 가게 일을 도왔다. 집안일을 도우며 공부하던 그는 장차 남편이 될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새미를 대학에서 만나는 행운도 얻었다. 그는 이 대학에서 우등으로 회계학 석사학위까지 딴 뒤 회계사 사무실에서 일하다 1989년 마침내 지방 정계의 권유를 받고 캔터베리 지방의회 의원으로 처음 뉴질랜드 정치무대에 서게 된다. 지방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예산을 600만 달러나 깎아 '600만불의 여자'라는 별칭까지 듣게 된 그는 1996년 총선 때는 국민당의 러브콜을 받고 비례대표 후보로 나서 아시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뉴질랜드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역사를 만들어내며 웰링턴의 중앙 정치무대로 진출한다. 하지만 뉴질랜드 정계에 진출했다고 해서 모두가 그를 환대를 해주고 고운 눈으로만 보아주는 것은 아니었다. 96년 총선 운동기간에 이민 반대 정책을 표방하는 뉴질랜드 퍼스트당의 윈스턴 피터스 대표는 그에게 '이름뿐인 국회의원'이라고 비하하는 듯한 표현도 서슴없이 갖다 붙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그런 말을 듣는 것은 그런 식의 대접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면서도 이민 정책을 놓고서는 그와 일전도 마다하지 않는 강인함을 보였다. 그는 총선에서 승리한 국민당이 뉴질랜드 퍼스트당과 연립내각을 만들게 되자 만일 국민당이 뉴질랜드 퍼스트당의 이민 정책을 수용할 경우 의원직에서 사퇴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심지어 요즘도 내가 말하는 영어 말투나 억양을 흉내 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털어놓으며 자신은 언제나 뉴질랜드 사람들처럼 대접받기 위해 투쟁해왔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