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돈 벌어 올게” _카지노 글자 글꼴_krvip

“한국에서 돈 벌어 올게” _룰렛 잘하는 방법_krvip

<앵커 멘트> 오늘 외식을 하셨다면 음식점에서 중국 동포 노동자를 만나지 않으셨습니까. 어딜 가나 쉽게 만날 수 있을 만큼 말이 통하고 생김새에 차이가 없는 중국 동포들은 한국에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어른들이 낯선 곳에서 미래를 일구는 사이, 남겨진 가족들의 오늘은 어떤 모습일까요.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는 동포 가족들의 가슴 아픈 사연들, 그리고 짧은 만남 뒤에 다시 찾아온 기약 없는 헤어짐을 담았습니다. <리포트> 중국 용정 일송정 근처에 있는 동포들이 사는 마을입니다. 부인과 딸은 한국에, 사위는 태평양 건너 미국에 보내고 이군준 씨는 홀로 지내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하나 뿐인 손자에게도 사랑을 쏟기 어려운 처지입니다. <인터뷰>이군준(중국 용정): “(손자는 언제 보고 못 보셨어요?) 작년에 두 번 갔다 왔다 금년에는 아직 일자리나 사돈 쪽에서 일이 있어야 가지 좀 가기도 그렇지. 내 딸 사위 있고 그래야 가기가 좋지 사돈 집에.” 이 씨네 바로 옆집도 가장이 한국에서 돈을 벌고 있습니다. 조선족 자치주 어디를 가나 세 집에 한 집 꼴로 이렇게 생이별을 견디고 있습니다. 연길시에 있는 수재원은 동포 수재들이 모여 있는 기숙사입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한국에서 일 하고 있는 이경이도 이곳에서 숙식을 해결합니다. <인터뷰>리이경: “(어떤 때 부모님이 가장 보고 싶어요?) 명절 때, 그리고 내 생일 때. (부모님이 뭐 해주시면 좋겠어요?) 없어요. 그냥 얘기 많이 하고 싶어요.” 부모의 사랑이 가장 많이 필요할 때 손길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 그래도 이경이는 내일이면 서울에 가게 됩니다. 첫 한국 방문. 그것도 대부분 3년도 넘는 이별 뒤에야 부모님을 만나러 온 길입니다. <녹취> “중국말로 어떻게 해?” <녹취> “한국말은?” 긴 여정에 피곤할 법도 하지만 밤이 이슥할 때까지 아이들은 잠들지 못했습니다. 숙소 한편에서는 자원봉사자가 연길에서 온 선희에게 엄마 사고 소식을 어렵게 전합니다. <녹취> “손가락 네 개 다 다쳤어. 치료를 잘 받아야 하니까 사흘 동안은 못 움직여. 그러니까 네가 내일 가야 돼.” 병원으로 어머니를 찾아가야 하는 선희는 그래도 울지 않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이날 밤, 잠을 제대로 이뤘을까요? <녹취>왕정자(엄마): “선희 왔니? 울지 말고 선희야. 울지 마 어머니가 있잖아. 어머니가 선희 보고 싶어서 얼마나 울었는데.” 병실에서 맞이한 3년만의 만남. 모녀는 한참을 눈물로 부둥켜 안았습니다. <녹취>왕정자(엄마): “언제 이렇게 많이 컸니...” “손이 이만큼 떨어져 나간 거야. 이젠 거의 나았어.” “괜찮다 이제. 니 손이 있잖아.” “응.” “네가 그랬잖아. 어머니 손 없으면 네가 손 대신한다고.” 눈물바람이 끝난 뒤에는 스스럼 없는 우스개도 오갑니다. <녹취>고선희(딸)와 왕정자(엄마): “내 이름 붙인 간판이 두 개야. 또 한 집 있어. 책 빌리는 데. 그 집의 딸이 또 선희야.” “정자 상점이라 하지.” “가서 바꿔.” “지금 바꿔야지.” 정을 나누기에는 턱없이 짧은 만남 뒤, 모녀는 세 밤 뒤를 기약합니다. <녹취>왕정자(엄마): “선생님 말 잘 듣고….” “엄마 잘 먹어.” “그래 엄마 밥 많이 먹을게.” “어머니가 금요일에 간다” 그날 밤 다른 아이들은 오랜만에 부모님과 함께 선물 보따리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습니다. <녹취> “이게 무슨 그림이야? 한번 보자.” “안 돼.” “보는 게 뭐 어때? 원래 그림 배웠잖아. 이게 뭐야? 뭐 하느라 이거밖에 못 그렸어? 이거 사인 받느라고?” “안 돼…….” 부모를 만나는 날 밤은 그렇게 깊어갔습니다. 선희 어머니가 옷을 갈아입고 정성껏 머리를 매만집니다. 선희가 기다린다는 생각에 어머니는 말도 채 끝마치지 않고 차에 오릅니다. <녹취>왕정자(엄마): “나오니까 안 아프네요.” “기분이 좋아지셔서 그래. 아이고 다행이다.” 3년만에 엄마와 먹는 점심. 선희는 먹는 둥 마는 둥 엄마 반찬부터 챙깁니다. 선희는 그날 하루, 약속대로 엄마의 손이 돼 줬습니다. 놀이공원에 엄마와 함께 온 그날 오후, 하필 선희가 아픕니다. <녹취> “괜찮은 거지?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몸도 마음도 같이 아픈 모녀, 그래도 함께 있는 이 순간이 행복합니다. <녹취> “좋네, 우리 딸하고 같이 다니니까. 처음이다, 그치?” 하지만 행복은 길지 않았습니다. 놀이기구를 몇 개 타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어머니가 병원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녹취> “우리딸 울지 마 선희야. 어머니 사랑합니다하고 한 번 해봐. 한 번만 말해 봐. 어머니가 듣고 싶어. 어머니 그래야 갈 거야. 어머니 사랑해요……. 우리 딸 사랑한다, 우리 딸 사랑한다. 여기 앞에서 한 번만 해봐.” 결국 선희는 기약 없는 이별 앞에 사랑한다는 말도 전하지 못했습니다. <녹취> “울지마 선희야, 안녕... 우리선희 잘 부탁한다” 마지막 밤. 숙소에는 슬픈 웃음이 가득합니다. 한 아버지는 딸과 보내는 마지막 밤을 사진으로 남깁니다. 아직 할 이야기가 많은 이경이네는 다른 가족들을 피해서 로비로 나왔습니다. 오늘 밤도 동포 가족들은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이별은 이제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씩씩하고 담담하던 선희는 공항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파묻었습니다. 검색대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가족들은 좀처럼 손을 놓지 못합니다. 눈이 좋지 않은 이경이 어머니도 아이가 들어간 뒤 한참이 지날 때까지 유리벽 너머를 희미한 눈길로 더듬으며 눈물을 훔칩니다 짧은 재회 뒤 기약 없는 이별을 한지 사흘째 되는 날, 이경이가 남기고 간 선물은 대전 집 서랍 속에 고이 모셔 뒀습니다. <인터뷰>리광수(이경이 아버지): “우주의 기를 모아서 이거 끼면 잘 풀린데요. 그래서 이거 몸에 떨구지 말고 항상 끼고 다니라, 일이 잘 풀릴 거라고… (왜 안 하고 계세요?) 아끼려고요.” 3년만에 가진 일 주일 간의 만남, 부모님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요? <인터뷰>리광수(이경이 아버지): “체온도 느끼고 냄새도 맡고 전화 아무리 통화해도 그런 거 느낄 수 없잖아요. 그런 거 느끼는 가운데서 많은 게, 근심하는 것도 많이 해소되고 아마 우리 일 하는 데 많이 힘이 되죠. 아이들이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 큰 힘이 되죠.” 장애인으로, 동시에 외국인 노동자로 사는 삶. 하나뿐인 딸을 두고 나온 고생길이지만 시간을 되돌려도 딸을 위해서라면 같은 선택을 하겠다는 게 두 사람 생각입니다. <인터뷰>고선희(이경이 어머니): “후회 안 해요. (힘은 들지만?) 네 힘은 들지만 후회 안 해요. (몸이 아파도 병원에 못 가는데도.) 그래도 하는 데까지. 아이하고도 약속했잖아 가는 데까지 가보자. 우리 힘이 닿는 데까지. 아직도 못한 일이 많잖아요. 할 일도 많고.” 국내에 들어와 있는 중국 동포 노동자는 38만 명 정도입니다. 이들이 중국 현지에 두고 온 가족 중에 10대 청소년도 수십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국 사회의 저임금 단순노동 수요를 성인 동포들이 채우고 있는 사이 중국 현지에서는 가족 해체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와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도 없이 현지에 남겨진 청소년들은 오늘도 가족과 민족의 의미를 묻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