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총알받이였어요”…지금 그 아파트엔 ‘유령’만 산다_엄청난 별명을 얻은 가수는 누구일까요_krvip

“우리는 총알받이였어요”…지금 그 아파트엔 ‘유령’만 산다_바카라 대화방_krvip


월세 최저 2만 3천 원.

쪽방촌 월세? 아닙니다. 번듯한 아파트의 월 임대료입니다.

혹시 20년 전 뉴스? 아닙니다. 2020년대 얘기입니다.

요즘 그런 아파트 월세가 어딨냐고요? 있었습니다. 3년 전까지 140여 명이 살았습니다.

3년 전 ‘그 사건’만 없었다면, 십중팔구 지금도 그대로 있었을 겁니다.

그 아파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대구 달서구 성당로 187

20대 여성 A 씨는 2018년 말 대학원 합격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목표했던 곳이라 기뻤습니다.

문제는 통학이었습니다. A 씨의 집은 전북 전주시. 대학원은 대구였습니다. 매일 오가긴 불가능한 거리. 대구에 집을 얻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넉넉지 않은 형편이 고민이었습니다. 아르바이트와 병행한다 해도 매달 수십만 원씩 월세를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다 신문에서 우연히 임대 아파트 공고문을 봤습니다. 눈을 의심할 만한 값싼 임대료 였습니다.

월 임대료 최저 2만 원대, 최고 5만 원대.

대구 한마음아파트 외경방이 비었는지 문의했습니다. 입실 가능하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래, 여기다! 대구행 짐을 쌌습니다.

대구 달서구 성당로 187, 한마음아파트와 A 씨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 “아무것도 없던 날 품어준 곳”

한마음아파트는 애초부터 A 씨와 같은 이들을 위해 지어진 곳이었습니다.

역사는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정부는 노동자들의 주거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전국 곳곳에 ‘근로 청소년 임대아파트’를 지었습니다. 2030 저소득 여성을 주로 받았습니다. 한마음아파트는 그런 곳 중 하나였습니다.

월 임대료는 101호, 102호 같은 호실 전체를 쓰면 5만 7천 원. 두세 명이 한 호실을 나눠 쓰면 더 아낄 수도 있었습니다. 큰 방만 쓰면 3만 4천 원, 작은 방만 쓰면 2만 3천 원 이었습니다.

물론 단점도 있었습니다. 30년 넘은 아파트에 사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바퀴벌레와 같이 살다시피 해야 했고 수도에선 녹물이 나왔습니다.

비어있는 대구 한마음아파트 호실 내부 화장실그래도 따뜻한 곳이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쳐가던 타지 생활에 위로가 된 건 아파트 주민들이었습니다.

‘부모님이 보내주신 귤 몇 개씩 들고 가세요’ ‘폐기물 수거 신청한 건데 깨끗하니 쓰실 분 쓰세요’.

이름 모를 주민들이 현관에 두고 간 귤 상자와 수납장을 보며 혼자가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A 씨에게 한마음아파트는 제2의 고향이 됐습니다.

■ “지금 들어가면 못 나와요”

한마음아파트…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지 않으십니까? 그렇습니다. 한동안 뉴스를 사실상 도배했던 이름입니다.

2020년 3월 5일, 전국에서 아파트로는 처음으로 코호트격리(동일집단격리 : 쉽게 말해, 건물 전체가 통째로 격리되는 일) 조치 됐던 곳입니다.

그날 이후 제2의 고향은 제2의 감옥이 됐습니다.

2020년 3월 KBS 뉴스“지금 들어가면 못 나와요.”

경비 아저씨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갔다가, A 씨는 그대로 갇혔습니다.

아파트에서 확진자가 연달아 나오면서 ‘코호트 격리’에 들어간 겁니다. 격리 기간 동안, 사람들은 아파트 정문에 밀가루와 계란을 던졌습니다.

코호트격리는 길지 않았습니다. 닷새 뒤 해제됐습니다.

진짜 고역은 그때부터였습니다. 아파트를 드나들 때 곁눈질이 따라붙었습니다. 집 앞에 커피 한잔을 사러 가도 ‘지나가는 행인인 것처럼’ 말끔하게 차려입고 나갔습니다.

물리적 격리는 풀렸지만, 심리적 격리는 풀릴 기미가 없었습니다. ‘혐오’라는 낙인이 찍혀버린 듯 했습니다.

그렇게 6달이 흘렀습니다.

‘혹시 재계약할 마음 있느냐’는 경비실의 통보를 받았습니다. 고민은 길지 않았습니다. 이틀 만에 짐을 빼 대구를 떠났습니다. 감옥살이를 더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2020년 9월이었습니다.

2년 3달이 지난 뒤 A 씨는 힘겹게 입을 뗐습니다. 인터뷰 요청에 처음에는 ‘떠올리기도 힘든 기억’이라며 손사래를 쳤습니다. 거듭된 설득에 용기를 냈습니다.

이렇게 욕을 먹을 바에 (아파트를) 나가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난한 사람들이 총알받이가 돼서 괴로웠어요.
- 한마음아파트 전 거주자 A 씨(2020년 9월 퇴소)

■ “총알받이가 됐었다”...여전히 두려운 ‘낙인’

다른 퇴소자들은 취재진과의 접촉을 꺼렸습니다. 코호트 격리 이후 가해진 낙인이 여전히 상처로 남은 듯 했습니다.

퇴소 후에 이력서 쓸 때 아파트 이름을 지우고 냈었어요. 지인들이 이전에 살던 곳을 물어도 그냥 집에 살았다고 얼버무리고.
- 한마음아파트 전 거주자 B 씨(2022년 1월 퇴소)

인생에서 가장 변변찮던 시기에 한마음아파트에 살았어요. 각자 어떤 사연이 있는지 알지 못하면서 몰아가고 공격하니 보기 좋지 않았어요.
- 한마음아파트 전 거주자 C 씨(2019년 6월 퇴소)

주변 이웃들은 한마음아파트 주민이 평소 눈에 잘 띄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아파트 밖으로 잘 나오시지 않던데.” “안 보인지 좀 됐어요.”

그도 그럴 것이, 코호트 격리 이후 주민들은 이른 아침 한 번에 우르르 나갔다 늦은 밤 우르르 들어왔다고 합니다. 흘긋대는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 입주민 아무도 남지 않은 ‘유령’ 아파트

한마음아파트는 코호트 격리 이후 신규 입주를 받지 못했습니다. 지난해 11월 8일, 마지막 퇴소자를 끝으로 완전히 텅 비게 됐습니다.

이 마지막 퇴소자는 텅 빈 100세대짜리 아파트에서 2달여를 혼자 살았습니다. 퇴소 시기를 앞당기고 싶었지만, 이사갈 집을 제때 못 구했다고 합니다.

지난 3년간 들어오는 사람 없이 비어가기만 했던 아파트는 인적 없이 고요했습니다. 취재진이 다시 찾은 그곳은 현관엔 먼지와 거미줄이 가득했고, 우편함엔 수개월 전 우편물만 있었습니다.

대부분 호실은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미처 챙기지 못한 커튼과 텔레비전 등 가전제품이 급했던 퇴소를 짐작게 했습니다.

불 꺼진 채 텅 비어있는 한마음아파트해 질 무렵 다시 찾은 아파트. 불이 켜진 집은 단 한 집도 없었습니다.

■ 1985년 준공 ‘청소년 임대아파트’...역사 속으로


한마음아파트는 2025년 공공임대주택인 ‘행복주택’으로 거듭날 예정입니다. 올해 중으로 철거에 들어갑니다. 헌 임대아파트를 헐고 새 임대아파트를 짓게 됐으니 잘된 일이긴 합니다.

그런데 A 씨와 그 이웃들의 마음에 남은 상처도 함께 허물어질 수 있을까요.

한마음아파트는 ‘코로나19 시행착오’를 상징하는 공간입니다. ‘취약 계층’은 어김없이 신종 감염병에도 더 취약했지만, 지원과 대비는 충분치 못했습니다.

감염의 대가는 더 혹독했습니다. 방역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사생활까지 들춰져 무분별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신천지 아파트라는 이중 낙인까지 덧씌워졌습니다.

신천지라는 종교 단체의 문제점과는 별개로, 초반 확진자들이 ‘신천지 신도’여서 확산을 키웠다는 객관적 증거는 아직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길게 만나는 어떤 형태의 모임도 집단발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사회적 격리’를 겪었습니다. 처음엔 중국인, 그 다음엔 신천지 교인, 그 뒤로는 대구와 경북 시민, 한동안은 성 소수자….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는 방역은 지속 가능할까요. 감염 확산으로부터 한층 자유로워진 지금, 확산 초기를 되짚어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마음아파트 앞에서 만난 한 평범한 시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다 지나봐야 알아. 지나보고 겪어봐야 아는 거죠. 사람들이 다 겪어봤으니까, 전처럼은 안 그럴 거예요.”

[연관기사]
지금은 ‘유령 아파트’가 됐습니다…여전한 ‘코로나 낙인’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6324862